[사회교리]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 교회는 세상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사람들과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교회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가난한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교회 활동의 근거는 바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에 있다. 1. 누가 가난한 자인가? 모 방송국의 드라마에서 1930년대의 가난한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유년시절에 서울의 청계천 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였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서 얻어먹고 잘 집이 없어서 움막에서 생활하였다. 반면에 200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은 1930년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잘 살고 있다. 오늘날 1930년대에 볼 수 있었던 움막은 사라졌고 경제 발전 덕분에 기아에 굶주리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숫자가 줄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난’이란 말과 ‘가난한 자’란 말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가난’이란 말은 경제적 관점에서 파악되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자’는 궁핍한 사람, 재산이 없는 사람,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인 빈민을 비롯한 노동자, 소작인 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부유한 집안에서 주인 덕분에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종이나 노예는 ‘가난한 사람’에 끼지 못하였다. 반면에 오늘날 ‘가난’이란 말은 인격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이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자신의 인격적 성숙을 올바르게 이룩해 나가는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정당하게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밀려난 사람 등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란 경제적으로 자립된 삶을 꾸릴 수 없는 빈민을 비롯하여, 타인의 도움과 보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어린이,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하여 소외받는 여성,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노인, 사회활동에서 밀려난 실직자·노숙자, 사랑의 보금자리를 잃은 결손 가족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가난’은 경제문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인간 인격의 완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동시에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인류 공동체의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2.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부유한 자들을 배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우선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비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가 우선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하고 해방하려는 교회 본연의 활동이다. 교회가 실천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한쪽을 선택하고 한쪽을 버리는 배타주의나 사람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분파주의가 아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들이 당하는 고통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선택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하는 교회의 존재 의미를 제공해준다. 또한 교회는 이 선택을 통하여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달리 말해서 사랑 받을 자격을 갖추었기에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을 펼쳐야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에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우선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3. 왜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가? 교회가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과 선택에 근거한다.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하느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언자들을 파견하셨다. 또한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이를 선택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 자신이시지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새로운 사태, 17) 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 조건 안에서 가난과 빈곤의 상태를 선택”(자유의 자각, 66)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예언자들의 의해 가난한 사람의 구세주로 예언되었고,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였고 당신 자신을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 하셨다.(참조. 마태, 25,31-46) 그분은 풍부한 재물을 가졌지만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다. 이와 같이 구세사에서 하느님은 가난한 이를 선택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을 사랑을 증거해야 하는 교회는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극히 존엄한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란 그 사실로 인하여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며 그 존엄성을 실현하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인간다운 삶,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을 방해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난으로 인하여 인간 존엄성에 손상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이 손상받는 것이며, 나아가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느님께 손상을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손상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는 것이며, 손상된 하느님의 영광을 보상하는 활동이다. 4.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가난한 이는 가난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난은 인간의 죄와 나약한 본성의 결과이며 그 귀결이다. 가난은 모든 인간들이 거기서부터 가능한 한 완전히 해방되어야 하는 악이다.”(자유의 자각, 67) 교회는 인류를 가난의 악에서 해방시켜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교회는 영적인 구원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 인하여 물질적·사회적·인격적 차원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하여 활동하여야 한다. 이 활동은 먼저 우리 각자가 사회 생활 안에서 사회의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가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때 가능하다. 그 의식은 곧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악임을 인식하고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 자매로 바라보는 형제애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연대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을 지니고 사회의 정의 실현, 공동선을 추구하는 활동, 인권수호 활동,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성을 실현하는 활동, 가난한 이들의 세계에 투신할 때 우리는 진정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며 가난의 악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듯이(참조. 마태 9,12),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가 필요하다. 가장 훌륭한 의사는 환자의 병을 잘 낫게 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의사이듯이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삶의 개선을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은 교회의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 각자의 투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난하고 허약한 이들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자. 이 섬김은 크고 위대한 것부터가 아니라 과소비를 줄이고 음식을 아끼며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봉사를 통해 쉽게 실현될 수 있다. 5. 글을 맺으며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 자신들은 과연 이 선택을 삶에서 실현하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형제이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남의 고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겪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 당하신 예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곧 고통 당하는 예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편하고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가난을 선택하셨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투신하셨다. 그분을 따라 우리도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자. 선택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복음화하는 선택이다. 이 선택에 대한 값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치르게 될 것이다.( 마태 25,31 이하 참조) [월간 빛, 2002년 10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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