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해 - 저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
교회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고, 경축하고, 실천하고,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 신앙의 공통 언어인 ‘신경’은 우리가 믿는 신앙과 행동하는 신앙의 내용을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는 사람들인지, 신경은 이에 대한 표지입니다.
신앙의 해를 맞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해설을 시작하면서, 지난 호에 바로 이런 부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신경이 담고 있는 각 신앙 내용을 하나하나 숙고할 차례입니다.
하느님을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통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첫 내용은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니까 첫머리에 나오겠지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모두 세 번의 호흡 안에 욀 수 있는 구절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과 관련해서는 삼위일체 신앙이, 전능하신 하느님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의 섭리, 악과 고통의 문제 등이 따라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창조와 피조물의 세계, 천사의 존재, 인간 존재 등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됩니다.
신학 과목으로 치자면, 신론, 삼위일체론, 신정론, 창조론, 신학적 인간학 등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문제를 여기서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한번 꼼꼼히 읽어보시면 좋겠지요.
꼭 염두에 두실 것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측면과, 그 하느님이 우리와의 관계 안에서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까지 하시는가 하는 측면이 언제나 함께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측면이 계시의 역사, 구원의 역사 전체를 관통합니다.
이제 여기서는 다만 ‘한 분이시고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계시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파견을 통해 드러난 신약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구약의 한 분 하느님의 구체적 표현 그 이상이 아닙니다. 세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하느님 안에는 구별과 일치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지요. 곧 하느님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완전하고, 이 구별이 완전한 만큼 동시에 그 일치도 완전합니다. 불완전한 사랑은 ‘너’를 ‘나’ 안에 소유하거나 배제하려 하기 때문에, ‘너’를 죽입니다. 구별이 부족한 만큼 일치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 안에서는 구별이 클수록 일치도 크고, 반대로 똑같이 일치가 클수록 구별도 큽니다. “구별은 일치를 이루어주고, 일치는 구별을 이루어줍니다”(증거자 막시무스). 참된 사랑은 너를 언제나 ‘너답게’ 하고, 그럼으로써만 너와 나 사이에 참된 일치를 이룹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사랑이 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완전합니다. 그리고 이 구별이 완전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한 분이신 하느님과 삼위일체 하느님은 서로 충돌하거나 다른 분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곧 하느님께서 삼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심은 결국 성경의 증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를 옮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요?
이 고백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만이 모든 존재와 삶에 유일한 근원이자 목적이심을 인정합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것에 최종적인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십계명의 첫 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첫 계명은 단순히 십계명 가운데 하나로서, 단지 십분의 일의 무게만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에 질서를 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말하자면 총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고백함으로써, 그분만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변화하는 세상의 최종 근거요 목적이심을 머리와 마음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입니다.
물론 현대인에게, 우리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하느님은 더 이상 그런 분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삶의 척도이자 의미가 아니라, 그저 여러 가치들 가운데 하나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신앙의 해에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만이 내 삶의 유일한 기준이자 의미임을 회복하도록 불리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단한 결과를 가져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2항 참조).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창조주이신 하느님
하느님만이 유일한 분이시고 완전한 사랑이시라는 고백은,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세상의 변화, 생성과 소멸은 근원적인 질문에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그것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것은 없는가?
하늘과 땅, 유형무형한 피조물의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경험상 우리는 세계가 유형무형한 만물, 곧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신경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피조세계, 땅은 보이는 물질적 피조세계를 의미합니다. 흔히 하늘이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저 우주창공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미의 하늘은 보이는 세계에 속합니다. 보이는 물질적 세계의 시작과 끝, 그 생성과 변화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이 탐구합니다.
신앙은 더 본질적인 것, 곧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의 궁극적 근원과 목적을 알려줍니다. 이 신앙에 따르면,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 세계 모두는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며,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세계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아무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고,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다니 3,52-90 참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위치를 창조세계의 전체성 안에서 새롭게 고찰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창조주시라는 고백은 그분이 아버지시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근원이 없는 근원’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시라는 말에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의 산물은 아닌가?’ ‘혹시 하느님이 어머니는 아니신가?’
물론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부성애와 모성애로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머니다운 관계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더 정답고 친근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이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머니답게 또는 여성적으로 표현한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신명 32,6 참조) 은, ‘남신’이니 ‘여신’이니 하는 이교 세계의 신화를 뛰어넘어, ‘세상의 창조주’, ‘초월적인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성별의 구분을 초월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9항 참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시면서, 그분과의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관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서는,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본래 부자관계 안에서, 우리도 하느님과 부자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은 구원 역사 안에서 계시된 진리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느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곧 가장으로서 자녀인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이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입니다.
물론 아버지와의 관계가 지긋지긋했던 경험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어야 하는지는, 우리를 위해 어떻게까지 하셨나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에 비추어 정화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만이 참다운 아버지상을 왜곡 없이 보여주십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김혁태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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