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91) 사랑 · 나눔 몸소 실천한 ‘두트바일러’
스위스인을 위해 존재하는 ‘미그로’
지난 2008년 스위스에서는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계적인 대형마트 체인인 까르푸가 스위스에서 철수를 선언한 것입니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소매유통전문 협동조합인 미그로(MIGROS)와 코프(Coop Swiss) 두 협동조합과의 경쟁에서 밀려 더 이상 이익을 실현할 수 없게 된 탓입니다.
미그로는 철저히 지역사회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운영 방식과 함께 공익우선의 전통을 바탕으로 굳건한 신뢰를 받고 있는 국민기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스위스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2008년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금융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미그로가 이처럼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기까지에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이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90년 역사를 지닌 미그로는 1923년 창립 당시만 해도 주식회사 형태의 사기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런 미그로를 오늘날의 협동조합으로 탈바꿈시켜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미그로의 창업자인 고틀리프 두트바일러(Gottlieb Duttweiler, 1888~1962)였습니다. 취리히에서 미그로를 설립한 두트바일러는 처음부터 커피, 쌀, 설탕, 파스타, 코코넛오일, 비누 등을 트럭에 싣고 마을을 순회하며 판매하는 ‘직거래’라는 혁신적인 사업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회사 이름도 도매와 소매의 중간이라는 뜻을 담아 미그로(Migros)라고 정했습니다. 그는 중간 유통 마진을 줄여 경쟁자들보다 40%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미그로가 대기업 반열에 오른 1941년 그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정을 합니다. 미그로를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던 그는 모든 스위스 사람들에게 기부한다는 취지로 자신의 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누구든 10스위스프랑만 내면 조합원이 되어 미그로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7만5000명이 그의 뜻에 함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물질제일주의에 물들고 많은 이들의 눈길이 경제적 이익창출이라는 폐쇄적인 울타리에만 머물고 있는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트바일러는 협동조합 전환 후에도 어느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미그로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체계를 마련해나갑니다. 일반 조합원, 지역 조합, 연합회 등 3단계로 이뤄진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고, 사업 방향은 조합원이 뽑은 대의원이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7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도 주요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적 정신을 바탕으로 창립 때부터 지구환경과 지역사회를 생각하는 경영방식을 실천해오고 있는 미그로는 1957년부터 해마다 전체 매출의 1%(2010년, 약 1260억 원)를 사회공익을 위한 사업에 지출하며 지역 주민들 사이로 스며드는 활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창업자의 정신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계승해 오고 있는 미그로는 ‘스위스를 위해, 스위스인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조합’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미그로는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으면 외주업체에 맡기기 보다는 직접 제조를 통해 판매하며 소비자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약국과 주유소 등도 운영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두트바일러의 뜻에 따라 지금까지도 미그로 매장에서는 술과 담배를 판매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그로를 통해 나눔의 정신이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나갈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나눔과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준 두트바일러의 삶에서 예수님의 자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은 듯 보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5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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