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60) 폭력에 무심하고 익숙한 사회, 그리고 그리스도인
사랑의 계명에 적어도 차별은 없어야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주님(그리스도, 메시아)이라 고백하며,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밝히셨다. 물론 그 아버지의 뜻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차별 없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측량할 도리가 없다.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하느님께서 그 무게를 헤아리실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계약으로, 성전으로, 그리고 율법으로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지를 셈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매개로 '하느님 사랑'의 길을 보여주셨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되고 헐벗은 사람, 병들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마태 25,31-46 참조)들이다. 한마디로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고(마태 18,10), 차별하지 않으며(야고 2,8-9 참조), 더 나아가 그들 가운데에서 교회의 창립자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4월 25일,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그저 육우당(六友堂)이라 부르던 한 젊은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10주기 추모 기도회가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자신의 호를 육우당이라 지은 이유가 너무 마음 아프다. 육우당은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그리고 묵주라는 여섯 친구를 뜻한다.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나 보다. 그에게는 묵주도 친구였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7조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도록 권고하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교의 어떤 연합회에서 강력하게 반발하며 인권위의 결정을 철회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동성애자 인권운동 활동가인 그는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종교계의 태도에 항의하는 유서와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서로 사랑하여라
매일 저녁 6시 30분에 서울의 대한문 앞에서는 거리 미사가 봉헌된다. 정치권이 유권자의 표를 의식할 때에는 쌍용자동차매각 과정을 국정조사를 할 것처럼 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외면한다. 그 막강한 힘 앞에서 평범한 노동자와 시민은 무력하다. 쌍용차 희생자를 기리는 분양소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임시로 만든 꽃밭을 보면, "너무나 힘이 없어 스스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생명이 그들에게는 강제로 꽂힌 꽃의 생명만큼도 못한 것인가"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가장 작은 고을 가운데 하나인 제주의 강정에서도 매일 거리미사가 봉헌된다. 미사 때면 경찰은 누군가의 업무추진을 위해 법을 집행한다며 사람들을 둘러막고, 공사장 정문에 앉아 있는 이들을 들어 옮긴다. 힘없는 이들은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병들어 눕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힘있는 이들에 의해 힘없는 이들은 그렇게 도처에서 스러져간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의 공통점은 힘 없고 약한 처지에 놓인 개인이나 집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예수님 시절에도 대부분의 유다 민중은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이중의 폭력 앞에 대책 없이 신음했다.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억눌렀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로마제국에 부역하고 집단의 안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다. 이렇게 폭력은 언제나 비겁하게 힘없는 사람과 집단을 향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오늘 주일미사에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말씀을 소개하며 강론을 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걸 그리스도인 가운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을 모르는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가 있을까.
예수님처럼 사랑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라면, 적어도 차별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불이익을 가하지는 말아야 한다.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힘없다고 하찮게 여기고, 나와 다르다고 불이익을 태연하게 가하는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누구인가 돌아봐야 한다.
[평화신문, 2013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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