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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믿나이다: 십계명과 우상숭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14 조회수2,968 추천수0

[나는 믿나이다] 십계명과 우상숭배

 

 

지난 호는 ‘평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 있음을 다루었다.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오늘날 전쟁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평화를 지키고자 ‘조소의 대상’이 되는 맨몸의 예언자가 필요하다고까지 가르친다.

 

오늘은 십계명에 비추어 평화를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신앙을 핑계로 자행되는 폭력과 전쟁이야말로 우상숭배임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의 삶의 도구 가운데 하나인 ‘경제활동’이 어떻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벗어날 수 있는지 성찰할 것이다.

 

 

1. 우상숭배 : 하느님을 사람의 도구로 만들기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하는 십계명의 처음 세 계명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도 없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희망하며 믿고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독자에게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십시오. 또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십시오.” 하고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이두 물음의 공통된 답은 그 모두가 “한 분 하느님을 사랑하고 희망하며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을 두고 한쪽에서는 ‘악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한 성전’이라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그리스도교 문명의 침략에 대항하는 이슬람 문명의 성전’이라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다인 대량 학살이 있었다.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표현을 떠올리는 보스니아 내전의 배경에도 이슬람과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 따위의 종교가 있다.

 

한 분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한다는 믿는 이들끼리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과 살육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서” 하느님을 욕보인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애써 위안을 삼고 싶겠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높게 쌓아올린 장벽이 견고해지면 견고해졌지 허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서로를 그렇게 미워하고 때로는 폭력까지 휘두르면서 경건하게(?) 야훼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작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다른 종교인들을 ‘악의 무리’라고 낙인찍고, 그들의 종교행위를 경멸하고 종교적 상징물을 파손하는 행위들이 마치 자기 신앙의 투철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는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완성되는 십계명 가운데 앞의 세 계명의 핵심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면 ‘하느님을 도구로 삼지 마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이념과 명분, 전쟁과 폭력에 동원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평화를 구현하는 맨몸의 예언자, 조소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태도는 하느님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신앙의 탈을 쓴 우상(도구) 숭배라 아니할 수 없다.

 

 

2. 우상숭배 : 하느님을 밀어내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너의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재산을 탐내서는 안된다.’” 따위의 일곱 계명을 지킴으로써 따른다. 하느님의 계명이라는 거룩함을 갖기도 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고 공동선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규칙이라 할 수 있다.

 

지나친 비관이라 할 수 있겠으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하느님의 계명이라는 거룩함도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규칙도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세력은 이른바 시장이라는 얼굴을 갖고 있다.

 

우리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 조문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국민에게 그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어느 사석에서 얼마 전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여기서 시장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노동이 배제된 시장 곧 자본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편한 이야기로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사람의 생명도, 인간의 존엄함도, 가정도, 공공의 선도, 문화도, 교육도, 사회질서도, 정치도 시장이 지배한다. 위의 일곱 계명은 모두 돈의 손아귀에 꽉 잡혀 숨을 못 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꾸짖으며 양심을 괴롭힌다.

 

“교회는 현대에 이르러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통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이데올로기를 배격하였다. 한편으로 교회는 ‘자본주의’를 시행함에서도 개인주의와 인간의 노동에 대한 시장 원리의 절대적 우위를 거부하였다. … 시장 원리만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것은 사회의 정의를 위배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25항. 이하 “교리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 가운데 하나가 ‘자유시장 경제원리’라는 것이다. 이는 ‘세계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그럴 듯한 표현으로 포장되어 우리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인간의 노동에 대한 시장원리의 절대적 우위”를 넘어 절대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이는 세상의 어떤 힘도 시장 곧 자본의 힘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는 노랫말은 말 그대로 옛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좀 더 자극적으로 표현하면 세상과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정당한 방법으로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다 하여도, 그 시초부터인류가 받은 땅은 여전히 공동의 선물이다. 비록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사유재산권과 그 재산권의 행사를 존중해야 하더라도, 재물의 보편적 목적이 무엇보다 우선한다.”(교리서,  2403항)고 가르친다.

 

사유재산권과 그 재산권의 행사를 존중하더라도 그것이 곧 무제한의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재물의 보편적 목적이 사유재산권과 그 행사보다 우선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재물의 보편적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다. 재물은 인간 존엄함과 공동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물론 교회는 시장 경제의 장점들을 인정하면서도 “비인간적이고 소외를 낳는 제도로 타락”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며 경계하고 있다.

 

“시장이 자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적절한 한계선을 정하고 이를 보장하는 윤리적 목표들에 굳게 뿌리박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장만이 모든 종류의 상품을 공급할 임무를 맡을 수 있다는 생각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환원주의적 시각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다. 실질적인 ‘시장의 우상숭배 위험에 직면하여, 교회의 사회교리는 시장의 한계를 강조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49항).

 

 

3. 성찰하기

 

1.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세우셨고, 가정의 기본 구조를 마련해 주셨다.” “공권력은 인간의 기본권, 올바른 가치 서열, 법, 분배 정의와 보조성(가정이나 시민단체 등의 하위 구조의 자율성)의 원리를 존중하면서 봉사하는 데 행사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요약편”, 456항, 464항. 이하 “요약편”). 그러나 허물어진 가정의 배경에는 이른바 ‘경제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마련한 가정의 기본구조를 돈이 허물고 있다는 말인가? 이때 공권력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넷째 계명)

 

2. 교회는 “일곱째 계명은 정의와 사랑, 절제와 연대의식을 실천하여 다른 이의 재산을 존중할 것을 명한다.”(요약편, 506항) “열째 계명은 탐욕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과 시기심을 금한다.”(요약편, 531항) 그리고 “국가는 통화 안정과 효과적 공공 서비스 외에도 개인들이 자유와 재산에 대한보장을 확고하게 하며, 경제 분야에서 인간의 권리행사를 감시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약편, 515항).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는 심화되고, 가난은 대물림되며, 기회의 불평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심지어 월 소득 50만 원 이하의 가난한 사람의 사망위험도는 월 소득 250만 원 이상 소득자의 2.4배나 된다. 학력, 취업, 건강, 여가, 외모에서도 격차가 확대되고 대물림 조짐마저 보인다. 과거에는 특정 일류대학 수석 합격자 가운데 가난한 집 출신이 꽤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부유층 자제들이다. 취업에서도 추천 등을 통해 상류층 자녀들이 좋은 직장으로 가고 있다. 영호남과 수도권의 격차, 대기업과 하청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으로 그 얼굴을 드러낸다. 가난의 대물림과 기회의 불평등은 한 인간의 존엄함을 파괴하고, 계층 격차와 위화감이 커진다는 것은 공동선 실현을 가로막는다. 정의와 사랑, 절제와 연대 의식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구현하는 것은 이상주의에 불과한가? 시장(자본)의 자율은 무제한이며,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이나 불간섭은 정당한가?(일곱째, 열째 계명)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 경제원리’, ‘세계화’라는 용어들이 혹시 ‘시장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무제한의 경제적 자유는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고 억압하게 된다. 경제적 자유가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이는 인간을 위한 경제라기보다는 경제를 위한 인간이라 함이 옳지 않은가?

 

인간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정의와 사랑이 시장권력 앞에 무력하다면 하느님의 자리를 시장에 내주었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된 말은 아니다. 시장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했고, 우리는 그 시장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는 셈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실제는 시장(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십계명은 개인의 일상에만 갇혀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세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폭력의 구조를 걷어내고 평화를 건설함으로써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의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2008년 3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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