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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믿나이다: 나와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4 조회수2,590 추천수0

[나는 믿나이다] 나와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지금까지 2005년에 새로 나온 “가톨릭교회 교리서 요약편”의 내용을 10차례에 걸쳐 살펴보았다. 먼저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증진하며, 혼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며 절정인 성사생활을 설명하고 있는 ‘그리스도 신비의 기념’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사실 성령의 궁전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밝히고 정화하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빛을 밝히려면 타야 하고, 짠맛을 내려면 녹아야 한다. 자의로 몸과 마음이 타들어가고 녹아내리는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이라는 투철한 신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참여 없이 홀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며,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성사와 같은 존재다.

 

하느님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그 사명에 헌신하고 투신함으로써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믿음의 내용을 담아놓은 ‘신앙고백’을 살펴보자.

 

 

1.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신앙고백)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다. 계시라 함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당신의뜻이 무엇인지를 우리 사람에게 알려주셨다는 뜻이다. 사람의 이성과 신앙은 성경과 거룩한 전승[聖傳]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동의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나와 교회의 신앙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경문에는 “주일과 대축일, 지역의 성대한 축제에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하 ‘신앙고백’)을 바치게 되어있고, “때에 따라서는 ‘사도신경’을 외울 수도 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정작 ‘신앙고백’을 알고 있는 교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비신자 교리 시간에 ‘사도신경’만을 배우고 외운 탓일 것이다.

 

그 기원을 확정할 수 없는 ‘사도신경’과는 달리 ‘신앙고백’은 4세기에 교회가 두 차례 공의회를 열어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을 정한 것이다. ‘신앙고백’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와 인류 구원의 역사를 고백하는데, 특히 성자의 인성을 부정하던 당대의 교회 내 이단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다. ‘신앙고백’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와,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세례와, 영원한 생명을 고백한다.

 

필자는 교리시간에 전 세계 도서관에 꽂혀있는 그 많은 교의신학 서적들도 사실은 모두 이 ‘신앙고백’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철학과 신학으로 풀어 설명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경향잡지 독자들은 시간을 내어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가톨릭 기도서”, 139-140쪽)의 한 구절 한 구절 그 의미를 되새겨보기를 권하고 싶다.

 

 

2.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교우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교리 중의 하나가 ‘삼위일체의 하느님’일 것이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풀 수 없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을 동원하고 비유를 동원하여 설명하지만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교우들도 많다.

 

‘삼위일체’에서 ‘위’로 번역한 그리스말은 ‘페르소나’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원래 연극 용어였다고 한다. 연극배우가 무대 위에서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할 때 그 배우는 배역에 맞는 ‘가면’을 쓰고 등장했는데, 이 ‘가면’을 두고 ‘페르소나’라고 한 것이다. 과거에는 한 배우가 여러 ‘페르소나’를 쓰고 주어진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함으로써 극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삼위일체’에서 ‘체’로 번역한 말은 ‘숩스탄시아’라는 단어인데, 무엇인가 서있을 수 있는 토대, 기초, 기반의 의미를 갖는다. ‘신앙고백’은 한 분 하느님(일체)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삼위)의 관계와 구세사에서 그 역할들을 정리하여 고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느님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믿나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하느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시고 만물의 창조주시며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교리서는 이 같은 물음을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며,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라고 밝힌다(교리서, 309항).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스럽다. 대상이 결코 사랑스럽지 못함에도 그 사랑을 거두어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낙원을 떠나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손수 만들어 입혀주시고, 온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할 카인에게 표를 해주시는 모습 속에서 슬픈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고통스러운 사랑을 볼 수 있다. 아담이 낙원을 떠나는 것도, 카인이 세상을 헤매는 것도,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것도 그 탓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카인과 둘째 아들에게 있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범죄’라 하고, 그들을 죄인 또는 탕자라 부른다.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바로 범죄에 대해 응징하고 보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과 보살핌을 거두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정의로운 사랑인 까닭이다. 사랑은 정의의 혼이고, 정의는 사랑의 몸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달콤한 것’만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오늘날 사회적 약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는 세상의 권력을 질타하며 당신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신다. 가뜩이나 삶이 고달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물 한 모금’ 주지는 못할망정 몸을 비틀어 눈물을 짜내는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눈감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호된 질책은 곧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비웃으며 ‘하느님의 정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로마제국의 무력과 종교 권력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그 한복판에 예수님의 철저한 비폭력과 비움의 길인 십자가가 높이 들려있다. 복음은 그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해방과 부활에 이르는 길임을 고백한다.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당신 아들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길에 동행할 것을 호소하시기에 슬프고 고통스럽다.

 

도시의 밤풍경은 십자가 네온사인으로 화려하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하느님의 정의로운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책에 떳떳할 수 있는지, 그 역시 자신할 수 없다.

 

 

4. 하느님의 외아들(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실패한 삶을 따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은 하늘과 땅은 더 이상 두 세계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결합시켰다.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참사람이 되셨음을, 부활은 그 참사람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할 신앙인은 곤혹스럽다. 사람의 눈에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어리석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공한 삶을 꿈꾼다. 오늘날 성공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개 능력, 사람, 돈, 운 따위가 그것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것도 갖고 계시지 못했다.

 

그분은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능력을 인정받았다면 복음에 등장하는 ‘대사제, 원로, 율법학자’ 무리에 들었을 것이다.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 그들과 교류하며 대사를 책임졌을 것이나,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이들은 무명의 군중뿐이었다.

 

그분 주변에는 인물도 없었다. 복음에 제자들 곧 측근들이 등장하지만 실망스럽기만 한 인물들이었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오해하기 일쑤였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을 부정했고, 마침내는 팔아넘겼다. 그나마 맺은 인간관계도 철저하게 실패한 셈이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불운의 전형이었다. 예수님의 삶은 실패한 삶이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순간까지 조롱의 대상이었다. 성공의 조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갖추지 못한 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분을 ‘그리스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신의 영달을 성취하지 못했음에도 그분은 세상이 갖추어야 할 모습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고,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온전하게 낮추고 비우셨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낮추고 비우신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실제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분이 되셨다. 참하느님으로서 참사람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예수님의 어리석고 실패한 삶의 초대에 동참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평생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는 삶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는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실현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세상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두고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설명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성령께서 그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 호에서는 ‘신앙고백’의 성령과 교회에 대해 살펴보고 연재를 마치겠다.

 

[경향잡지, 2008년 11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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