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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믿나이다: 성령과 교회를 믿나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1 조회수3,274 추천수1

[나는 믿나이다] 성령과 교회를 믿나이다

 

 

지난 호에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 가운데, 하느님 성부와 하느님 성자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간에게 쉼 없이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이야기하였다. 인류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은 고통스러운 그 사랑으로 우리의 여정에 동행하신다.

 

필자는 인류와 하느님의 관계를 축으로 연결되어 함께 굴러가야만 하는 두 수레바퀴에 비유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외아들(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한 삶의 전형이다. 그분한테서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한 삶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문을 빛낸 것도 아니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며, 막대한 부를 축적할 만큼 출중한 분도 아니었다. 단지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뿐이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실패한 삶에 동참한다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연재의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 어리석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시는 성령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믿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불편한(?) 성령

 

언제부턴가 우리 안에서 성령은 곧 치유나 이상한 언어의 은사를 가져다주는 것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면서도 혹시 불경한 것은 아닐까 망설인다. 어떤 이들은 체험하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니 그렇다면서, 성령의 오심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필자가 신학교 입학 피정 때의 일이다. ‘성령 쇄신 피정’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성당 근처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그 용어가 너무 생소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의 ‘성령 쇄신’이었음에도 필자에게는 엉뚱하게도 성령을 쇄신한다는 뜻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피정 마지막 날 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신입생들은 한 명씩 여러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는데, 촛불만을 켜놓은 방에는 수단을 입은 고학년 신학생(당시에는 신부님인 줄 알았다.)이 앉아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필자와 함께 기도를 하자고 청하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이른바 이상한 언어로 하는 기도소리가 들렸다. 놀람은 둘째 치고 신부님으로만 알던 선배 신학생이 함께 기도하자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당황스러웠다. 편한 마음으로 당신이하라는 대로 따라 해보라는 데 더욱 난감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든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을 들으며 방을 나왔다.

 

사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일이다.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은 교우를 방문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원의 의료행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마침 다른 교우들이 병문안을 와있었는데 그 이유를 알 듯했다. 그분은 치유의 은사를 받은 교우를 어렵게 초대했다. 병자성사를 하고 치유의 은사를 받은 분의 기도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제 교우는 성령의 힘으로 낫고 있다고 믿었으며(어쩌면 믿고, 싶었을 것이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그 교우는 성령께서 암세포를 몰아내는 중이기 때문에 통증이 심해지는 것이라고 위로(?)했다. 난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 공동선을 향한 성령,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

 

앞에서 지나치게 부정적인 개인의 체험을 이야기하였다. 이상한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는 은사를 베푸시는 성령을 부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죽음과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려는 나약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가벼이 여기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 두 가지 경계해야 할 태도를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성령의 은사가 지향하는 것은 ‘공동선’이라는 것을 간과하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성령은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는 태도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 은사를 열거하면서 이 모든 은사가 공동의 선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1코린 12,1-11). 그리고 우리는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라고 신앙으로 고백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행복과 이로움을 찾지 않겠는가? 자신의 행복과 이로움을 구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행복추구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 따위를 천부의 권리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신 권리라 하여 절대적 권리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국가라는 제도도, 법도, 관습도 이 권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타인과 세상과 하느님을 향해 있다. 그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관계’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 안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고,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가 사람이며 그 관계가 사람의 삶이다. 이 관계의 왜곡이 죄이며 그 죄의 결과인 관계의 단절은 그 자체로 죽음이다. 참된 행복과 인간다운 품위 있는 삶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관계에서 나온다. 이 옳은 관계를 우리는 ‘공동선’이라 부른다.

 

우리는 곧잘 이 공동선과 집단의 이익을 혼동한다. 집단적 이익이라는 것이 언제나 선하고 옳은 것은 아님은 역사가 보여준다. 우리는 집단이익으로 포장된 광기와 탐욕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류가 벌인 끔찍한 전쟁이나 민족과 종족 사이에 벌어지는 집단 살육이 집단 이익의 극단적으로 잘못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개인이든 인간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고 인간다운 품위 있는 삶을 추구하도록 이끌어가는 사회 환경의 총체다(사목헌장, 26항 참조). 이 공동선을 때로는 ‘사회정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개인이든 단체든 정의로운 사회에서 인간다운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인간다운 품위 있는 삶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다양한 은사들이 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사람들이 참된 행복과 인간다운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세상 곧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힘과 능력을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다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하느님께서 공동선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뜻이다. 치유의 은사가 개인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상의 부조리와 어둠과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으로 완성되어야한다. 이상한 언어의 은사가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깊은 결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세상에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세상의 어둠과 부조리와 고통의 실체를 환하게 드러내는 예언직의 수행으로 성장해야 한다.

 

 

3.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은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성사로서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교회’,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로 밝힌다(교회헌장, 1장, 2장 참조). 그리스도인에게는 귀에 익은 말이기에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공의회의 이 고백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뜻을 담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교회는 성부께서 준비하시고, 성자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회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실현되는 교회다.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드러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현되는 교회다. 거꾸로 이해하면 교회가 비록 인간으로 구성되었기는 하지만 인간의 조직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는 사람의 욕망이 어지럽게 난무하고,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동분서주하고, 사람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다투는 조직이 아니다.

 

공의회가 고백하는 교회는 보편교회를 말한다. 이 보편교회는 지역교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존재한다. 우리 교구, 우리 본당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지 또는 인간의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자.

 

‘그리스도의 성사’로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얼굴이며,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 곧 구원의 표지이며 도구라는 뜻이다. 일상의 경험에서 비유하자면 도로 표지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도로 표지판대로 길을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만일 도로 표지판을 잘못 만들어 세워놓았다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는커녕 오히려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보고 그리스도를 읽는다. 사람들은 교회를 보고 구원의 여정에 발길을 내딛는다. 하느님과 결합하기보다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표지판이라면, 온 인류의 일치를 촉진하기보다는 편가름하는 도구라면 잘못된 표지판이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를 옳게 드러냄으로써 구원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인지, 잘못 설치된 표지판인지 가늠해 보자.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교회는 인류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라는 뜻이다. 몸에서 소중하지 않은 기관이 어디 있겠는가?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소중하지 않은 것 없다. 그렇게 소중한 몸의 부분들이 제각각 고유한 모습으로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결합되어 있지 않은 부위는 없다. 서로 결합되어 기능하지 않는 부위 역시 없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 어느 누구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사랑, 하느님의 사랑 밖에 있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경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나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나, 둘째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따위는 모두 이를 가르친다. 혹시 한 마리 양을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외면하고 있다면, 몸을 이루는 수많은 지체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면 ‘그리스도의 신비체’라 할 수 없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가?’ 성찰해 보자.

 

‘하느님의 새 백성’으로서 교회는 백성 사이의 평등성을 함의한다. 하느님 한 분만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야훼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 곧 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일 뿐이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차별하는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지 않는가. 하느님께는 모두가 귀한 당신의 모상이며 당신의 숨결을 담은 분신 같은 존재다.

 

종교를 두고 차별하고, 남성 여성으로 차별하고, 국적을 갖고 차별하고, 능력을 갖고 차별하고, 신분을 갖고 차별하는 따위의 태도는 곧 하느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세상의 구조적 불평등, 사회적 불균형을 무너뜨리기보다는 외면하거나 묵인함으로써 정당화시킨다면 ‘하느님의 새 백성’이라 할 수 없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새 백성인가?’ 돌아보자.

 

성부께서 준비하시고, 성자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회는 그런 교회다. 교회는 그 구원과 해방의 도구이며 표지이다. 교회는 세상의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 얼굴이며, 하느님의 이름이다. 우리가 믿는 교회는 그런 교회다. 하느님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고, 하느님의 얼굴에 피땀이 흐르고, 하느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면, 교회는 분발해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앞에서 밝힌 교회의 모습은 이상일 뿐이며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그 교회의 모습은 천상 하늘에서나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서도 그분의 뜻을 용감하게(?) 부정하는 셈이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멘.

 

*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으로 시작한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성령을 믿나이다’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글을 써주신 박동호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경향잡지, 2008년 12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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