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우리는 왜 미사에 참례하는가? 지난 호에서는 우리 교우들의 성사생활 특히 고해성사에 관해 필자가 체험한 아쉬움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에 비추어 성찰하였다. 성사야말로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길이며 동시에 구원의 순간이기에 가장 귀하고 소중함에도, 교우들은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운 의무 정도로 받아들이고, 비록 힘겹게 고해소에 들어오더라도 고해의 내용이 형식적이며 기계적인 경우를 자주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신앙생활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지극히 개인주의의 경향을 보인다는 일부의 지적을 다루고자 한다. 신앙 행위가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의 단일체인 전인(全人)으로서 개인의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신앙 행위의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배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개인주의 경향으로 쏠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신앙생활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이웃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시하게 되고, 그리 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사명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 인류 구원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신앙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미사에서 엿볼 수 있는 개인주의 경향에 쏠리는 현상을 살펴보자. “왜 이름을 불러주지 않습니까?” 교우들은 미사참례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여긴다. 그 같은 태도는 백번 옳다.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희생의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신다. 비록 사제가 교회의 이름으로 미사를 집전하지만 희생의 제사를 집전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봉헌하는 희생의 제사, 구원의 제사이며, 이때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미사에 참례하는 우리 교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예수님과 합하여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미사는 당연히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 구원 곧 공동체의 성격을 갖는다. 미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 자신은 물론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 인류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인류 구원을 성취하신다. 그런데 간혹 미사를 개인의 사적인 경배 행위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를 만난다. 지면을 통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가 예민하지만, 때로는 그 도를 넘는 것 같기에 이야기를 꺼내야 하겠다. 물론 필자 역시 그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이른바 ‘미사지향’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흔히 교우들은 미사를 시작할 때 또는 미사경문에 따른 기도문 중간에 교우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미사는 000를 위한 생미사로 봉헌합니다.” 또는 “이 미사는 000와 000와 000를 위한 연미사로 봉헌합니다.” 하는 사제의 언급을 듣는다. 착오였든 실수였든 의도한 것이든 이름을 부르지 않았거나 잘못 불렀을 경우, 미사를 마치면 교우가 사제에게 또는 사무실에 찾아와 묻는다. “미사지향을 분명히 넣었는데, 왜 이름을 불러주지 않습니까?” 하는 데는 조심스럽게 또는 원망 섞인 항의의 뜻이 섞여있다. 이때 사제는 “원래 미사는 교회의 공적인 전례이지 개인을 위한 미사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미사를 거행하면서 기억했습니다.” 하는 정도로 달래며 다음부터는 꼭 불러드리겠다며 사태(?)를 수습한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미사지향에 따라 그 미사가 거행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그 미사를 통해 기억하며 기도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경우 자신의 지향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사제에게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으로서 미사에 특정 지향을 갖고 참례하는 분과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일종의 사적인 계약을 맺은 것과 같다. 사제는 그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한다. 사제는 공동체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권할 수는 있으나 “이 미사는 ‘000를 위한 생미사’ ‘000를 위한 연미사’로 봉헌한다.”고 할 수는 없다. 미사는 하느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가 인류 구원을 감사하며 하느님께 봉헌하는 공적 예배이므로, 장례나 위령미사, 혼인미사의 경우를 빼고는 개인의 사적인 소원 성취를 빌어주는 행위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번 기회에 미사 경문을 꼼꼼히 살펴보기를 권하고 싶다. 미사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개인을 위한 기도문은 한 군데도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미사 기도문 가운데 교황과 교구장 그리고 보좌주교를 호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그 개인을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사도들의 계승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다만 위령미사나 혼인미사를 봉헌할 때 돌아가신 분이나 혼인하는 분을 위해 바치는 기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공동체의 희생제사라는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하며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이나 교우들이 대답하는 내용이나 하나부터 열까지 공동체를 위하여 인류 구원을 소망하는 내용들뿐이다. 미사의 기본양식은 동일하지만 미사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본기도, 예물기도, 영성체 후 기도인데, 그 내용들도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인류 구원을 기념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것들이다. 어느 곳에도 한 개인의 소원 성취를 비는 대목이 없다. 혹시 소원 성취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면 몰라도…. “믿음으로 주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끌어주시어, 지존하신 주님을 직접 뵙게 하소서”(주님공현 대축일 본기도).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셨다. 그런데 그 평화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값진 희생을 치르며 일군 것이다. 그냥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그 평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조롱과 모욕을 당하며 생명을 바친 것이다. 섬뜩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피를 먹고 자란 열매인 셈이다. 그 귀한 평화를 제자들에게 건네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그 평화의 길을 걸음으로써 스승의 평화를 세상에 나누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바로 예수님의 이 평화를 나눈다. 사제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인사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 하며 응답한다. 사제와 교우들은 예수님의 평화로 결합한다. 이어서 사제가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하고 교우들에게 권하면 교우들은 서로 “평화를 빕니다.”며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은 못하더라도 당신께 평화가 되고자 고통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평화의 인사를 나눈 교우들이건만,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모른다기보다는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누고 사귀며 섬기는 교우(敎友)’란 말이 무색하다. 미사에 참례한 교우들은 십자가에 달린 가시관 쓰신 예수님만을 쳐다볼 뿐 서로의 얼굴을 보려하지 않는다. 교우들은 예수님의 이름만을 마음을 다해 부르지만 옆에 있는 이의 이름은 묻지도 않는다. 교우들은 주님의 성체만을 모시고 성당을 나서지만 앞에 가는 교우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동행하려 하지 않는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말이다. 물론 마음은 그렇지 않으며 미사 시간에 잠깐 옆에 앉아있었을 뿐인데 오랜 지인처럼 가까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나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평화를 빌어준 사람인데 그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게다가 사제는 미사 때 ‘간절히 청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어, 성령으로 모두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하고. 이 간절한 청과 평화의 인사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서로에게 무심하다. 예수님을 향한 태도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예수님을 향한 시선은 너무나 간절하며 애틋하다. 성당에 들어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들의 얼굴만큼 거룩하고 평화롭고 간절한 표정이 있을까? 하느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매달리며 예수님과 하나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가? 그러나 하느님을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분께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바라신 것인데, 정작 당신만을 바라보며 이웃에 대해 무심한 우리들을 보면 무엇이라 하실까?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면, 눈길이 만나도 어색하게 피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옆을 바라보지도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난감하실 것이다. 마치 여러 자녀들이 서로는 아는 체도 않으면서 부모에게는 효성 지극한 것과 같다. 그때 부모의 바람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서 고맙긴 하지만 너희끼리 우애를 나누며 지내는 것만큼 효도하는 길이 따로 없다.” 할 것이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왜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만 마음을 쓰고 하느님 백성인 이웃과 세상에는 무심할까? 하느님 백성공동체의 공적인 전례인 미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개인적인 신앙생활 쏠림현상의 또 다른 예로 우리는 보편지향기도를 들 수 있다. 분명히 교회가 바치는 보편지향기도는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인류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지역 공동체를 위해 청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보편구원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 기도는공동체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난 뒤에 그 간절한 염원을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기도를 바치는 그 순간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였을 수도 있겠고,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서 염원하였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먼저 그리스도의 성사로서 교회,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교회가 사랑과 일치와 쇄신의 공동체가 되게 해 달라고 정성을 다해 기도한다면, 그 목표를 위해 헌신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평화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뜻을 모아 기도한다면 평화의 도구로서의 몸짓을 마다하지 말아야 마땅하다. 물론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면 몸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지역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 지역 교회 공동체를 그 지역의 구원의 표지로 드러내는 데 힘을 쏟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의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신앙인이 자신만의 행복을 하느님한테 받으려고 미사성제에 참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미사성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개인주의로 쏠림현상을 이야기하였다. 물론 도시생활과 모든 분야의 변화는 새로운 형태의 복잡한 사회질서와 인간관계를 가져왔다. 오늘날 농경사회에서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앙의 개인주의 경향의 쏠림현상 역시 개인의 탓보다는 본당의 대형화와 사회 환경의 변화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신앙의 개인주의 경향의 쏠림현상을 극복하고 현대 사회에 맞는 공동체성을 찾아 뿌리내리기 위한 대안으로 ‘소공동체’를 제시하였으며, 1990년대 초부터 ‘소공동체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왔다. 냉정한 성찰과 평가와 대안 마련이 필요했고, 여러 교구에서 교구 시노드를 열어 그 작업을 수행했으니 실천의 과제가 남았다 할 수 있다. 일선 사목현장에서 사목자와 교우들의 더 큰 분발이 요구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과 같은 선언은 신앙생활의 공동체성을 외면한 채 오로지 개인의 구원만을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신다(사도 10,35 참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교회헌장, 제9항). 독자들은 공의회와 교구 시노드가 무엇이며, 헌장은 또 무엇인가? 또는 공의회와 시노드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은 흔히 “우리 어릴 때에는 라틴말로 미사를 했어.” 하신다. 아마도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전체 교회가 개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이 없었다면 2009년 올해에도 우리는 라틴말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사 때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기원후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 선언한 것이다. 공의회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길잡이가 되는 구실을 한다. 특히 헌장은 신앙생활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서 헌법이 법체계에서 최상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중요하다. 교회는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회법을 개정하고, 전례를 변화시키며, 교리를 풍요롭게 한다. 바로 그 공의회를 통해 보편 교회는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분명하게 재확인하였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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