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냉담 유감 지난 호에서는 신앙생활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지극히 개인주의의 경향을 보인다는 일부의 지적, 곧 신앙생활에서 개인주의 경향으로 쏠리는 현상을 이야기하였다. 이런 태도는 신앙생활이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이웃과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시하게 되고, 그리 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사명이라 할 수 있는 보편적 인류구원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신앙생활을 현세생활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가꾸는 세상의 시민이기에 신앙생활과 현세생활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 구별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세생활은 신앙생활을 통해 완성되며 신앙생활은 현세생활을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므로, 어쩌면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더구나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셨고, 참인간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늘과 땅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의 질서가 마치 현세의 질서와는 무관한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영역인 것처럼 생각한다. 오랫동안 냉담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에 냉담(冷淡)하였다는 교우들을 자주 만난다. ‘냉담하다’는 말은 “사물에 흥미나 관심이 없다.”는 뜻과 “동정심이 없고 불친절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냉담했다는 말은 신앙생활에 흥미나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신앙을 배척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무슨 이유였느냐고 물으면 대개 몇 가지 유형의 대답이 돌아온다. 우선 ‘먹고 살기 바빠서’ 형이 있다. 신앙생활을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주일에 성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사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또는 숨 막히게 바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다면 이루어놓은 업적이 대단할 것이다.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일을 했다면 그 일은 꽤 훌륭한 꼴을 갖추었을 것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톱니바퀴처럼 쉼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다시 뛰어들기 위해서일 뿐이다. 정말 그렇게 바쁘게 일을 하며 세상을 가꾸었다면 이 세상은 가장 아름다운 낙원에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둘째, “바쁘지는 않았지만 그냥 한두 번 빠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형도 있다. 그동안 신앙생활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몸짓을 한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구하려고 움직이듯이 지식을 쌓고자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문명은 그 아쉬움을 채우려는 인류의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 욕구나 지적 욕구만 충족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마음이란 것이 있고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음과 영혼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초월성을 말할 수 있다. 세례 때 교회에서 무엇을 청하냐고 물으면, 세례자들은 신앙을 청하며,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대답한다. 신앙생활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는 말은 현세생활에서 이 마음과 영혼의 갈증까지도 풀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세생활을 통해 물질적, 지적 욕구뿐만 아니라 영적 욕구까지 채울 수 있었기에 신앙생활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 현세생활은 얼마나 완벽한 것인가?! 셋째 유형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돌아오는 것은 힘겨움뿐이어서 하느님이 원망스러웠고, 그래서 발길을 끊었다.”는 형이 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세상살이는 더 힘들어졌고, 인간관계는 엉클어졌으며, 몸은 망신창이가 되었다는 것이며, 어떻게 해서든 그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냉담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현세의 삶에 불행을 가져다준 셈이다. 신앙과 삶을 나누는 태도 신앙생활을 외면한 이 세 가지 유형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세생활과 신앙을 두 개의 전혀 다른 생활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그렇다. 첫째 유형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시간을 따로 내야 한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고, 둘째 유형은 신앙생활을 하면 좋지만 현세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이며, 셋째 유형은 신앙생활이 현세생활의 유익함을 가져다주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 여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각 종교와 교단이 발표한 믿는 이들의 수를 합하니 인구보다 많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일생에 한 번이라도 다녀간 적이 있으면 믿는 이로 간주하여 등록하였거나 부풀렸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만큼 믿는 이들 곧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깨달음을 열망하는 이들, 곧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그토록 많다면 우리가 사는 현세질서는 그만큼 거룩한 모습이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고, 부처님의 중생구제의 계율을 따르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하느님 나라든지 극락이든지 꽤 많이 닮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이 그런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신앙생활과 현세생활을 서로 무관한 영역으로서, 이 둘은 물과 기름의 관계처럼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생활과 현세생활의 이분법적 태도를 거부하며 하느님의 하나인 계획 안에서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은 인간 구원을 그 목적으로 하며 모든 현세질서의 개선도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뿐 아니라, 현세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교회의 이상을 수행하며, 교회와 세상 안에서, 영적질서 안에서 자신이 사도직을 이행한다. 이 두 질서는 서로 구별되지만 하느님의 하나인 계획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신자이며 동시에 시민인 평신도는 이 두 질서 안에서 지속적으로 하나의 그리스도교 양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평신도 교령, 5항). 그들만의 잔치 이쯤해서 냉담하였던 마지막 넷째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실망’ 형이라 할 만하다.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신앙생활을 쉬었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을 일선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경우는 드문 편이지만(사제에게 말하기 거북해서 밝히지만 않았을 뿐이지 실제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유형보다는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앞의 세 유형이 신앙생활과 현세생활을 단순하게 구분하려는 태도에 불과하다면, 마지막 이 유형은 우리의 그 같은 태도가 누군가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며, 더 나아가 무신론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유형의 냉담은 그 속사정도 다양하다. 교회나 일부 성직자들의 지나친 정치적 행동이 못마땅해서 발길을 끊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현세질서에 대해 교회가 지나치게 무관심하며 오로지 교세확장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아서 하느님을 안 믿는다는 사람도 있다. 이 유형은 ‘그들만의 잔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잔치 음식도 맞지 않고 요구하는 예복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그 잔치 분위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공의회는 잔칫상을 잘못 차린 신앙인들의 탓이 없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분명히 자유의사로 자기 마음에서 하느님을 몰아내고 종교문제를 회피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므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신앙인들 자신도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무신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원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원인들 가운데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신앙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의 발생에 적지 않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사목헌장, 19항).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른 이들을 교회에 초대하기는커녕 잔치에 온 이들을 되돌려 보내거나, 아예 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튼튼한 싹을 보여주기보다는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인 것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서 세상에 파견되었음에도 ‘그들만의 잔치’를 벌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사명을 소홀히 하고 오히려 ‘그들만의 잔치’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메시아 백성(교회)은 비록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지도 못하고 가끔 작은 무리로 보이지만, 온 인류를 위하여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가장 튼튼한 싹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친교를 이루도록 세우신 이 백성을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세상의 빛으로서 땅의 소금으로서(마태 5,13-16 참조) 온 세상에 파견하신다”(교회헌장, 9항).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의 소금으로서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빛으로서 땅의 소금으로서 이 세상에 파견된 구원의 도구이다. 신앙생활은 세상 한복판에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표지를 더욱 또렷하게 빛내야 한다. 신앙생활이 성당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잔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앙교육과 종교생활이 기계적 성사생활에 머물고, 교리는 형식에 그치고, 윤리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하느님의 참모습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다.”거나 “믿는 사람이 더하다.”거나 “그래서 교회는 절대로 안 간다.”는 말을 듣는다면, 하느님과 구원의 성사인 교회의 참모습을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훼손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공의회는 단호하게 경고한다.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 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자녀는 자신의 뛰어난 신분을 자기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총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그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기는커녕 더욱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교회헌장, 14항).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응답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현세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그 질서를 완성하는 하느님의 일꾼이며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현세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키는 그 일에 흥미나 관심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냉담이다. 덧붙임 1 : ‘냉담’이라 부르는 것이 불편하여 요즘은 ‘쉬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덧붙임 2 : 이른바 ‘먹고 살기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거나, 교회가 힘없는 이들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교회에 발길을 끊은 경우는 교회의 끊임없는 정화와 참회와 쇄신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 환경은 별개의 두 세계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환경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환경(그것이 자연환경이든 사회 환경이든)의 테두리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신앙(생활)과 현세(생활)를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우들이 앞의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화려한 잔칫상을 마련해 놓고 남루한 행색의 가난한 교우를 초대한다면, 그런 잔칫상을 마련한 교회의 탓을 물어야 마땅하다. 세상을,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전장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사람의 탓을 묻기보다는, 세상을 싸움터로 만들거나 그에 편승하여 전리품을 챙기려는 세력에 탓을 묻는 것이 옳다. 교회가 제대로 된 구원의 표지라면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힘이 없어 무릎을 꺾을 정도로 절망한 사람들로 가득차야 한다. 혹여 그렇지 않다면 그 구원의 표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표지로서, 그 표지대로 따라가다가는 낭패를 볼 뿐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냉담교우 또는 쉬는 교우를 교회로 돌아오라고 하더라도, 교회가 올바른 구원의 표지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참회하고 정화하고 쇄신해야 한다. [경향잡지, 2009년 3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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