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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살이: 사제의 권위, 어디에서 오는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10 조회수3,572 추천수2

[세상과 교회 그리고 믿음살이] 사제의 권위, 어디에서 오는가?

 

 

지난 호에서는 쉬는 교우(어떤 분은 이를 그리스도교를 졸업한 동문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의 유형에 대해서 필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 가운데 교회 제도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나 교회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는 이른바 ‘개인으로서의 신자’라든지 거친 사회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의 문제는 교회의 반성과 쇄신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이른바 냉담교우 또는 쉬는 교우를 교회로 돌아오라고 하더라도 교회가 올바른 구원의 표지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참회하고 정화하고 쇄신해야 한다. 교회가 제대로 된 구원의 표지로 우뚝 서있다면, 교회는 세상에 희망과 용기의 보고(寶庫)로서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힘이 없어 무릎이 꺾일 정도로 절망한 사람들로 북적여야 할 것이다.

 

많은 교우가 사목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일부 불편한 시선이 있음도 사실이다. 이번 호에서는 필자가 주관적으로 꼽은 불편한 시선 두 가지를 다루며 성직을 성찰한다. 하나는 사목자의 태도를 두고 ‘권위적’이라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사목자의 생활이 “요즘 같은 세상에 얼마나 편한 생활이냐.”는 시선이다. 사목자로서 이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외면하고 태연할 수도 없다. 모든 하느님 백성과 마찬가지로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참여하지만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기는커녕 더욱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교회헌장, 10. 14항 참조).

 

 

신부님은 권위가 있을까, 권위(주의)적일까?

 

필자가 신학생 시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본당에서 절대로 교우들에게 반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사목자가 반말을 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교우들은 사목자에게 조심스럽게 존댓말을 하는데 사목자는 당당하게 반말을 한다면, 교우들은 겸손하게 듣고 또 듣고 있는데 사목자는 들으려 하기는커녕 쉼 없이 가르치고 꾸짖고 훈계만 한다면, 그리고 그 같은 태도가 성직자로서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분명 권위주의에 물든 태도라 할 수 있다.

 

‘권위 있다’는 말과 ‘권위(주의)적이다’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권위 있다’는 그것이 신뢰할 만하다는 태도를 보이는 말이고, ‘권위적이다’는 말은 신뢰 여부와는 관계없이 다만 그 태도가 독선적이거나 거만하여 편하게 소통할 수 없다는 뜻을 품고 있다. 실제로 우리말 사전에는 ‘권위주의’를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을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라고 설명한다.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이란 ‘권위’와는 사뭇 다르다. 권위는 바람직하지만 권위주의는 지양해야 할 태도인 셈이다.

 

말씀의 교역자, 성사의 집전자, 백성의 교육자로서 사목자가 그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인정을 받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을 갖추었다면 권위가 있는 사목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성직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을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보인다면 이는 권위주의로서 지양해야 마땅하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놓고 사람들이 놀라고 경탄하였는데,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사람들은 영향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분을 따랐으며, 제자들은 생업과 가족을 떠났으며, 세상살이의 고달픔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그분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런데 단순하게 그분의 가르침에만 권위가 있어서 그랬을까? 물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권위가 있었으며, 성령의 역사로 그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을 따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결정적인 권위의 원천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몸짓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당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그들과 맞추셨다. 배고픈 사람, 아픈 사람, 고달픈 사람, 슬픔에 젖은 사람, 그 사람의 처지를 남의 처지로 여기지 않으셨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의 삶의 형편을 당신 것으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머리 둘 곳 구하지 못하여 그들과 함께 이 마을 저 마을 다니셨으며, 그들과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셨다. 아마도 배고팠을 때도 많았을 것이며, 잠자리 불편했을 때도 많았을 것이지만 제자들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초막을 지어 편히 모시겠다고 했을 때에도 거절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못난 제자들에 실망하여 훌륭한 능력을 갖춘 다른 이로 물갈이하지 않으셨다.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지 않으신 셈이다. 그만한 능력을 갖춘 분이면 일신의 영달을 꾀하거나 거사를 도모하고자 하찮은 군중과 제자들을 버렸을 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과 끝까지 동행하셨다. 그분의 마음씀씀이 몸짓 하나하나 당신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의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분의 의리를 ‘사랑’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렇게 드러났다. 예수님의 마음씀씀이와 가르침과 행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치고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 잘하는 사람은 도처에 널려있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죽기까지 마음씀씀이와 가르침과 몸짓이 온전하게 일치하여 치열하게 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목자는 그리스도 교회의 봉사자다. 옛 표현을 빌리면 ‘종’인 셈이다. 섬김을 그 덕목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하여 사목자는 ‘교회를 섬기는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교회를 세속의 집단으로, 곧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 정도로만 이해하는 데서 중대한 오류가 발생한다. 조직을 꾸려야 하고, 우두머리를 내세워야 한다. 자연스럽게 성직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는 사목자의 권위가 제도가 부여하는 권력과 힘에서 나오게 되어있다. 권위주의에 빠질 위험이 상존한다. 교회에 대한 오해는 사목자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쉽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로서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목자의 권위는 앞에서 언급한 직무(말씀의 교역자, 성사의 집전자, 백성의 교육자)의 충실함에서 묻어나오는 것이지, 제도나 신분이 부여하는 권력과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당 사목의 의사결정 과정은 대부분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지닌다. 그 자체로 부당하며 바람직하지 않다 평가할 수는 없으나 공동체의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가 생략된다면 곤란하다.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일부 제한된 구성원의 뜻이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뜻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론이라 하여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여론 수렴 절차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옳은 길을 찾을 수도 있으며, 참여의 기회가 열려있어야 책임과 연대의 정신이 살아있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사목자의 임무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참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그 본래의 임무이다”(사제생활 교령, 6항).

 

사목현장에서 “우리는 신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동시에 사목자로서 “교우들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는 말도 자주 하는데, 여기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함정이 숨어있다. 권위(주위)적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앞의 구절에서 ‘우리’와 ‘교우들’이 일부 특정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다수의 평범한 교우들 또는 소극적이거나 쉬는 교우들을 배제한 것이라면,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을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곧 권위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정리하면 사제의 태도를 두고 ‘권위(주의)적’이라는 불편한 시선에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사목자가 예수님의 모범(마음씀씀이, 가르침, 몸짓의 온전한 일치)을 뒤따르지 않으면서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도 다른’교계 사제직이라는 힘만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교우들과 사목자의 의식과 태도에서 일부 특정 지향을 가진 이들의 선익(욕구)을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선익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같은 해석이 일리가 있다면, 사목자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개인과 환경’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사목자 개인에게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쉼 없는 쇄신의 작업이 필요할 것이며, 동시에 사목 환경의 개선 곧 교우들의 능동적 참여와 책임과 연대의 정신을 실현하는 공동체 건설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신부만한 직업이 어디 있냐?

 

교우가 아닌 벗에게 “요즘 같은 세상에 자네가 그래도 제일 좋은 직업을 선택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비록 벗이기에 사제로서의 삶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으나 듣기에는 거북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가장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그리고 힘겹게 사는지 너 같은 신부는 아마 모를 것”이라는 이야기가 꼭 뒤따른다. 에둘러서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네는 그런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편하게 지내는 데다가 교우들에게 존경까지 받으니 얼마나 좋겠냐!”는 뜻이다. 때로는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가벼운 불만도 털어놓는다.

 

그들이 수모를 당할 때 사제는 존경을 받는다. 그들이 밥줄 끊어질까 걱정할 때 사제는 명예를 걱정한다. 그들이 자식들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 사제는 품위를 유지한다. 어쩌면 한 쪽에선 곡을 하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춤을 추고 있는 형국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우리 아이가 신부님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신부 될 생각은 하지도 않아서 속상합니다.” 하는 이야기도 교우들에게 종종 듣는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어떤 분은 왜 자신의 아들이 신부가 되면 좋은지를 묻지도 않는데 친절하게(?) 밝힌다. 그 뜻을 정리하면 “요즘같이 살기 어려운 세상에 신부만한 직업이 없다.”는 것이다. 그 친절한 설명이 속을 뒤집어놓는다. “당신은 거룩한 사제직이 먹고 살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직업 정도로밖에 안 보입니까? 그런 생각으로는 사제가 될 필요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고 싶지만 참는다. 교우가 아닌 벗들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교우들마저 사제직을 편한 직업쯤으로 보게 되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이 같은 불편한 시선에 대해 사제로서 억울할 수도 있다. 사제직에 대한 그들의 왜곡된 태도가 못마땅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선이 실제로 왜곡된 것인지, 사제의 삶이 실제로 치열하지도 힘겹지도 않은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일이다. 양비론을 펼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분석이겠으나, 백 번 양보하여 그들이 오해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눈에 사제는 치열하고 힘겹게 사는 동시대인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사목헌장, 1항)라는 공의회의 엄숙한 선언은 선언에 불과한 것인가? 어쩌면 그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제자 특히 교계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제들의 삶이 현대인의 슬픔과 고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상향, 천국의 다른 삶으로 비친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다.사목자는 분발해야 한다. 비록 세상이 사제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교우들이 사제직을 잘못 이해하고 있더라도 그 탓이 사목자에게 전혀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이 그 분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 쇄신과 온 세상의 복음 전파 그리고 현대 세계와의 대화라는 사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사제에게 강력히 권고한다. 교회에서 권장하는 적합한 방법을 활용하여, 사제들은 언제나 더 높은 저 성덕을 향하여 매진하고, 하느님의 백성 전체에 봉사하는, 날로 더욱 적절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사제생활 교령, 12항).

 

사제 스스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헌신해야 하지만,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헌신하도록 도와야 한다. 사목자에게는 분명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권위의 원천을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직무와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사목자는 분명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세상살이 먹고 살기 편한 몫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를 실현하는 고단하지만 영예로운 몫이어야 한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박동호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신수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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