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돋보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우리는 주일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한다. 무심코 이렇게 기도를 바치다가 ‘육신의 부활’이라는 대목이 새삼 낯설고 어렵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 고백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육신의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할지 부활시기에 함께 생각해 보자. 부활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릴 적 교리반에서 배운 부활 교리다. “사람이 부활하면 어떤 모습일까요? 낳자마자 죽은 아기는 아기로 부활하고 호호백발 할머니는 쭈그렁 늙은이로 부활할까요?” 대답은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서른셋에 돌아가셨기에 우리 모두 서른셋의 나이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만일 어린 나이로 죽은 사람은 아기로 부활하고, 호호백발로 죽은 사람은 쭈그렁 늙은이로 부활한다면 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다 불평이 대단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것을 억울하다고 할 것이며, 고생만 하면서 살았으니 청춘을 되돌려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런 소박한 상상만으로는 안 된다. 사후 곧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 어떤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육체도 부활 생명을 누린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988-1019항에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한마디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한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육체를 지닌 채 부활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육체도 부활 생명을 누린다. 이것이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당신의 육체를 제자들에게 확인시키셨다. 당신이 몸뚱이는 없고 혼만 떠다니는 유령이 아니라 하셨으며(루카 24,39),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잡수시고(루카 24,30; 24,42), 당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보게 하신 것은(요한 20,20.27) 다 당신 몸의 부활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남으로써 주님 부활의 목격 증인이 되었다. 이 증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부활의 증인’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부활에 대한 인류의 희망은 오랜 동안 그저 간절한 희망으로만 존재해 왔다. 이는 하느님의 계시가 시작된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부활은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비로소 현실 또는 실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ㄱ) 하고 선언하셨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위한 선언이 아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분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ㄴ-26). 그렇다. 주님의 부활 선언은 죽을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세계의 도래이다.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그분이 부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볼 차례이다. 그분은 부활(의 희망)을 거부하는 사두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4.27).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야이로의 딸 - 마르 5,35-43;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 - 루카 7,11-17). 이것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장)에 잘 나타나 있듯이 당신 부활의 예고이며 인간 부활에 대한 징표와 보증이다. 죽음과 함께 이루어지는 부활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을 예고하시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분은 당신 죽음과 함께 부활을 예고하신다(마르 8,31; 9,31; 10,34 병행). 복음서에서 이처럼 당신 죽음과 부활을 함께 예고하시는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죽음만을 따로 예고하실 수도, 당신의 부활만을 따로 예고하실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써만 부활을 증언할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세례성사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세례성사에는 부활만 있는 게 아니고 죽음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콜로 2,12; 2티모 2,11 참조). 죽음과 부활은 하나로 통합되며 우리는 이를 파스카 신비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우리 우리의 부활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물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부활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부활의 완성이고, 지금 여기에서도 우리의 부활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주님을 믿고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이 이미 자라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보자.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ㄴ-26). 세례성사뿐 아니라 성체성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부활 생명을 확인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것이다”(요한 6,51.56-57). 죽음 앞에서도 변함없는 희망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땅에 묻는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묻힐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부활의 희망은 꺾이기는커녕 더욱 강해진다. 나는 이 죽을 몸,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불사불멸의 몸으로 되살아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42-43.53-55) 그리고 나는 감히 부활의 세계를 이렇게 그려본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 된 존재이며, 인간은 그 육체로 물질계 곧 보이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영혼으로 영신계 곧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 인간의 부활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이사 65,17 참조)을 열 것이다. 그 새로움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날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이 죽을 육체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부활의 증인 노릇에 정성을 다할 뿐이다. * 정승현 요셉 - 전주교구 신부. 현재 광주 가톨릭 대학교 총장.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정승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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