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6호] 더욱 완전한 사랑을 위한 생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 딸린 지체는 여럿이듯이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다양한 지체 중에서 수도자들은 평신도에 속하면서도 그 생활 형태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여기저기에서 열심하고 헌신적인 평신도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모습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수도회나 수도자 그리고 이런 열심한 평신도들이 보여 주는 활동 등은 교회 안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요. 교회가 인가한 수도 생활 형태의 의미와 가치 - 교회 안에서의 수도 생활 형태 : 사람이 자기 생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지향하는 목적에 따라 생활 모습 및 형태가 형성된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목적은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믿고 따르며 찬미와 예를 드리는 것으로서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한 생활 형태가 요구됩니다. 수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생활을 더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에 적합한 생활 양식을 선택한, 즉 스스로 범해서는 안되는 것을 공적으로 서원함으로써 그 목적에 이르고자 하는 신앙인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1고린 12,12) 신앙인으로서 지향하는 목적은 같습니다만, 모든 신도가 다 같은 생활 형태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는 다양한 생활 형태를 가진 신도들이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 형태로 발전되어 온 이 수도 생활 양식을 받아들여 인가한 것입니다. 수도 생활은 교회 안에서의 한 가지 생활 형태입니다. 그러나 각 수도회는 교회 역사 안에서 독특한 영적 카리스마를 가지고 그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증거하고 그에 헌신함을 목적으로 창립되기 때문에 교회안의 수도회라 할지라도 그 생활 양식이 시대와 카리스마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인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더 헌신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수도자들이 많이 존재하기를 허락하고 장려하는 한편 수도 생활의 제규범이 현실적이면서도 성스러운 교회 회의의 문서에 합치하기를 요구합니다. - 수도 서원의 의미 :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전도하러 갈 때 아무 소유물도 가지지 말 것이며(마태 10,9 참조) 영으로나 실제적으로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마태 5,3; 루가 6,20 참조)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수도자의 길이며 이를 위해 수도자는 교회 안에서 그가 속한 수도회에서 정결, 청빈, 순명의 수도 서원을 합니다. 이 서원은 자유 의지로 누구의 강요나 어쩔 수 없는 경우 때문에서가 아닌 스스로 하느님께 자신을 종속시켜 봉헌하는 생활로 먼저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의지적인 결단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도자의 모습과 함께 그 의미를 새겨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수도자의 본질적 모상은 모든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그분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 지상에 펼치시기 위해 오셨고 그것을 위해 일생을 사셨으며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믿도록 하셨습니다(요한 5,19 이하 참조). 예수님은 자기 비하 즉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시면서 종의 신분을 취하시어 가난, 순명, 사랑으로 이 지상 생활을 하신 분이십니다(필립 2,6-11). 또한 게쎄마니의 고뇌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인 그 고난의 잔을 받으셨고(마르 14,22 이하 참조), 우리를 박해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하셨으며 당신 스스로 그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루가 23,34 참조). 수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든 점들을 더 가까이 따르고 닮으려 하는 사람이며 이 완덕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길로만 매진하는 사람입니다. 수도 서원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완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수도자가 탐욕을 부려 세상일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가난을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수도자는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 실제의 삶에서도 가난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자 개인으로서만 만족할 것이 아닌 수도회 전체가 갖추어야 할 덕이며 사명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수도자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 가난을 원합니다. 또한 만약 수도자가 세상의 명예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세상에서의 높은 자리(마태 20,20-28 참조)를 탐하거나 사회적으로 탁월한 인물로 부각되기를 바란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섬기는 사람’(마태 20,28 참조)의 모상을 잃게 됩니다. 수도자는 자기 인품과 능력과 판단력을 내세우는 “세상에서의 통치자”(마태 20,25)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반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느 이름보다 빼어난 이름’을 얻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비하를 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펴시기 위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명하심으로써 ‘그 어느 이름보다 빼어난 이름’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으셨습니다(필립 2,9). 그러므로 수도자는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어’(마태 20,27 참조) 그리스도와 같이 봉사하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신(마태 20,28)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수도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영의 경향을 면밀히 통찰해야 합니다. 가난을 침식하는 부귀에 대한 탐욕이 내심에 싹트지 않았는지,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데 세속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은 없는지, 십자가의 그리스도보다 오히려 내 자신의 안위와 평안, 능력을 더 사랑하지 않았는지, 선행을 한다는 명목으로 “위선자들의 칭찬”(마태 6,2)처럼 스스로 나팔을 불거나 기교를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지 등 사고와 기지와 감정 등의 정화를 성찰해야 합니다. 또한 수도자는 관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익히고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바를 나도 함께 바라고, 그분처럼 가난한 이와 병자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죄인들과 함께하여 죄인의 벗이 되신 것같이 죄인인 나도 세상의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기를 바라며, 그분이 게쎄마니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고민하신 것처럼 나도 그분의 어려움에 함께하기를 원하며,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 따르고자 하는 원의를 받습니다. 따라서 침묵, 고독, 관상은 수도자의 내적 생활을 키우는 길입니다. 수도자는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몸에 배이게 하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은 수도자가 추구하는 궁극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는 자신을 정화시키고 침묵과 고독, 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체험을 위해 세상의 일들을 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적 권고에 의한 수도 생활이며 수도 서원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수도회 또는 평신도의 자선 단체가 교회 안에서 지니는 의미 - 수도회는 자선 사업 단체인가 : 수도회는 자선 사업 단체가 아닙니다. 수도회는 본질적으로 교회에 주신 하느님의 구원 성업에 협조하는 공적 단체입니다. 따라서 수도자는 그가 속한 수도회에서 자기 구원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봉헌된 사람입니다. ‘구원’이란 어떤 사회 사업 혹은 자선 사업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헌과 부활을 이룩한 하느님의 경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모상을 갖추어 세상에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수도회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복음 선포의 방법들은 어떤 조직 또는 사회 사업 기구 등으로 형성될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증거 즉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경륜에 협력하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수도회가 처음부터 사회 사업을 하기 위하여, 사회가 원하는 자선 사업을 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면 그 수도회는 교회가 바라는 본래의 뜻을 왜곡한 것이 됩니다. 수도자는 어떤 자선 사업체의 고용인이 아닙니다. 또한 수도자 역사 자선 사업체를 운영 · 경영하는 경영주가 아닙니다. 흔히 수도회가 운영하는 사업체 때문에 수도회와 사업체를 동일시하거나 또는 사업체에 존속된 수도회로 착각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 지망자를 마치 자선 사업체의 운영자로 취급하거나 본인도 그러한 목적으로 수도회를 택할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적 권고와 그리스도의 삶, 수도 영성보다 기능과 학식, 재능 등이 수도 성소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수도자의 모상 정립의 방해 요인 중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 평신도 자선 사업체 : 평신도 자선 사업체는 위와는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평신도에게는 복음적 권고로 인한 교회 내에서의 공식적 의무와 책임이 없습니다. 만일 평신도 모임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인정받으려 하거나 또는 자선 사업 단체를 결성하려 할 때는 해당 교구장의 인가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교회법 제299조 3항 참조). 따라서 평신도가 사사로이 서약을 하고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나 수도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수도자가 갖고 있는 성격과는 다릅니다. 평신도는 자선 사업 또는 어느 특정 기구만을 위해 헌신할 수 있으므로 평신도와 사업체는 일체감을 가질 수 있고 또 더 효과적인 운영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도회와 일반 평신도와는 그 서원의 차이에서 오는 구별이 있게 됩니다. “교회 창립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전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세계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평신도 교령, 2항). 따라서 모든 지체는 제각기의 처지와 장소에서 부르심을 받아 복음 선포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그리스도의 명백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평신도도 자기 영혼의 구원과 남을 위한 봉사, 그리스도와 교회의 훌륭한 사도직 수행자이며 교회는 이런 헌신적인 평신도가 많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도적 활동을 하느님의 백성이 더욱 활발히 수행하기를 희망하는 성스러운 공의회는 평신도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는 날로 격증하는 인구, 과학과 기술의 발달, 보다 긴밀해지는 인간 관계”(위 교령, 1항) 등으로 평신도의 사도직 무대를 확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세속에 묻혀 사는 그들의 특수성을 살려 불타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 누룩이 되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2년 8월호, 정한채 요셉(예수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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