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6호] 우리는 과연 잘못 살고 있는가 막상 신자가 되고 보니 ‘이것도 죄, 저것도 죄’, 죄라는 명목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 신앙을 알기 전보다 훨씬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에 신앙 생활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하셨는데 왜 우리는 죄를 멍에처럼 메고 전전 긍긍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요. 양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은 인간 지성이 지니는 양심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문장을 제공해 줍니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 귀에 들려준다. 이렇게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을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16항). 양심을 가리키는 라틴어 CONSCIENTIA는 라틴어 CUM(함께)과 SCIENTIA, SCIRE(지식, 알다, 지각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되는 단어로서 어원적으로 볼 때 이는 하느님과 나 자신이 함께 아는 부분 혹은 하느님과 나 자신이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적 중심으로서 성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따라 살지 않을 때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죄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 안에서의 양심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1고린 8-10장; 로마 14장, 2고린 4,1-2, 로마 2,14-16; 디도 1,15; 1고린 1,12. 4.3-4; 로마 9,1; 히브 9-10장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의 사상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몇 가지 유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선함 혹은 악함을 규정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권한입니다. 이 양심은 그 행위가 연약하거나 강함에 관계없이 구체적으로 자신이 행해야 할 것을 자신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지식과 자유이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이 둘의 조화입니다. 따라서 이 둘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되며,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지식과 자유는 애덕에로 향해야 하고, 그 애덕에 따라서 실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이거나 이기주의적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양심으로부터 선하고 바른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양심과 죄 의식 구약 성서는 이스라엘의 믿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살피시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신들을 부르신다는 것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찬미하거나 혹은 비난합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죄가 없다는 주장을 굽힐 성싶은가? 이날 이때까지 마음에 꺼림칙한 날은 하루도 없었네.”(욥기 27,6)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제가 이런 못할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야훼여, 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2사무 24,10)라고 말합니다. 범죄자는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는 결코 지적인 앎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의 깊은 가책과 관계됨을 말합니다. 비록 카인처럼 하느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의 면전에 여전히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저지르고 난 후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질책하며 또한 그 마음을 조명하고 정의에로 인도하는 성령의 속삭임에 귀기울이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마음의 고뇌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비록 모든 의도가 올바르고 성실하여도, 그리고 개인의 탓 없이도 오류는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며, 이럴 경우 양심 자체의 품위는 손상되지 않으며 또한 그 행위의 윤리적 책임도 부과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선과 의를 추구할 때 그의 양심은 완전 무결한 종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회개 죄 자체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는 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마음 편하게 살았는데 신자가 되고 보니 생활의 모든 것이 죄라는 생각에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불평하는 신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죄와 회개가 분리된 생활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실상 죄를 지칭하는 어떠한 단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이나 비유, 그리고 매일의 생활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을 통해 어떻게 올바른 길을 내딛을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면서 죄와 회개의 경험들을 설명합니다. 성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죄에 관한 일치된 진리는 죄가 결코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정의 그리고 죄를 없애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부의 최종적인 계시 아래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단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한 보충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결코 죄와 율법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쁜 소식 위에 자리잡는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 성서는 첫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과된 성부의 구원 의지로서의 사랑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웃에 대한 증오, 반목, 완고함, 그리고 자비의 결핍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둘째로 성서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생동하는 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하느님과의 우정,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 아래 생명과 자유를 충만히 누리고 생활하기에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생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자유와 생명을 때때로 포기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에게 매이게 되며, 하느님 없는 세상과 죽음의 지배를 받는 종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로마 7장 참조).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이 바로 죽음의 지배를 받는 대표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셋째, 계약의 파괴 역시 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약속과 인류와 그분과의 계약에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의 구원 계획 아래 인간들 사이에 일치를 이루며 계약 안에서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해방과 구원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계약 관계에 있으며 이 계약을 잊어버릴 때 죄의 상태에 빠져듭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죄란 계약에 덜 충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네번째로 성서는 암흑, 오류, 사기의 어떤 주제로서 죄가 가지고 있는 개인 및 사회적 차원의 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거짓의 노예가 되면서 참된 진리를 이탈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죄는 인간을 사탄의 자녀로, 거짓의 아비(요한 8,44-45 참조)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우상, 사기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서의 거짓 생활을 선택하면 할수록 성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진리와 지혜, 그리고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반대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 성서는 죄에도 등급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항상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거나, 전체 혹은 부분적 소외로부터 벗어나라고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보면 배교, 간음, 살인, 음행, 근친 상간, 교만, 탐욕, 사기, 실망, 무기력함 등등 여러 가지 있지만 그 모든 죄들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서 이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12,31-32).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생명과 구원의 성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 앞에서조차 회개하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회복 불가능한 무딘 마음입니다. “나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어.” “비록 그분이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 해도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은 아닐거야.” “내가 지은 이 죄는 하느님이라도 용서하실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점점 더 하느님과 벌어지는 것이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아우구스띠노 성안은 인간의 죄를 가리켜 “오! 복된 죄여.”라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은총과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인간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죄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비록 늘 죄 중에 떨어지는 인간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보다 범죄했다 하더라도 즉시 뉘우치고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하시는 하느님을 우리의 죄를 처벌하시는 분으로 먼저 인식한다면 그것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축소시키고 거부하는 행위로서 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며, 비록 자주 죄에 떨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하느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큰 은총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3년 3월호, 이동익 레미지오(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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