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해설] 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경건한 마음의 상태나 거룩한 감정, 다시 말해 믿음의 대상이나 내용이 없는 인간적인 태도나 정신적인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신경에서 “나는 믿나이다”는 말은 연속되는 그 다음의 내용, 즉 하느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믿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사도적 신앙은 그럴듯한 거룩한 소리를 함으로써(한국 교회가 해결해야 할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대로 차근차근 채워 갈 수 있는 빈 그릇 채우기 식의 믿음이 아니다. 사도적 신앙은, 변경시킬 수 없는 내용으로 그 방향이 결정된 것이고, 그 내용과 관계하는 데서 움직여진다. 현대에 하느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이 문제를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새삼 어려운 문제임을 절실히 느낀다. 사실 지난 수백 년 동안 하느님에 관한 주제는 서구 사상사의 중추를 이루었고, 하느님은 존재와 사고의 계급 질서에서 제일 원리이자 최종 목표였다. 그러한 사조에서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위용을 떨치던 형이상학이 말하던 신관(神觀)은 인본주의에 의해 배척을 당하고 기술 공학이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서구 사회는 거센 세속화의 물결에 휘말리게 된다. 그 결과는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을 통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제 가치들을 뿌리째 뒤집어 놓음으로써 하느님이나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쓸모 없는 것이라 일축하며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으로부터 간섭받을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신은 죽었다는, “하느님의 죽음 혹은 사망”을 외치며 사신론(死神論)이나 무신론(無神論)을 유포시켰다. 게다가 동유럽을 휩쓸었던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아편으로까지 여기며 종교 말살 정책을 감행했다. 그 결과로 종교는 말살되지 않았지만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서구에서의 “하느님의 죽음”과 동구에서의 “하느님의 침묵”은 현대의 문화 속에서 “하느님의 주제”(主題)를 추방했는가? 아니다. 이러한 사회적 사조의 거센 변화 속에서 하느님의 주제는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얻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십자가의 언덕”을 불도저로 밀어 버릴 때마다 신자들이 밤새워 새 십자가를 세웠다는 “리투아니아의 골고타”(가톨릭 신문, 1993년 9월 19일자 4면 참조)는 이러한 사실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왜일까? 그 이유는, 과거의 지극히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던 신 개념은 거부되었다 해도, 인간의 삶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제기되면서 하느님 주제는 새로운 가치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운명, 양심, 삶과 죽음의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니면 문화나 사회적 조건으로 좌지우지될 수 없는,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 것으로 나의 존재를 온전히 감싸 주실, 나의 존재의 시작과 의미를 밝혀 주실 영원하신 그 어떤 절대자와 밀접한 관계성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사도 신경의 첫 말과 마지막 말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재발견된 하느님 주제에 관한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지 못하고 사회의 제반 환경이 비인간화되어 가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 문명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문화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과, 또 과학이나 의학의 기술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고 만들어지는 것만으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경험한 서구의 교훈을 거울삼아야겠다. 나라는 주체가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제외된 인조 인간이 아닌 한, 혹은 그저 짧은 생을 살다가 사라져 버릴 허무한 그런 존재가 아닌 한, 하느님의 주제는 우리의 생활 안에서 언제나 선선한 가치를 지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22항은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은 심한 상처를 받을 것이며 생명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아 절망에 빠진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과 가지는 기본적인 만남의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며, 왜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경이 그러한 맥락에서 하느님을 말하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하느님의 죽음’과 ‘하느님의 침묵’을 외치는 문화 속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신 존재 증명은 먹혀 들지 않는다 해도, 어쩌면 성서의 백성들이 만난 하느님에 대해서는 매력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은 철학자들의 신이나 일반적인 신 개념의 범주에 속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언제나 현존하는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과제도 이젠 형이상학적인 신을 보여 주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보여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성서는 결코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묻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존재 증명을 위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성서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성서의 역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 인간에 관한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야훼”(출애 3,1-15; 34,1-7) 라고 밝히시고, “나는 나다.”(출애 3,14)라고 모세의 물음에 답하신 분은 성서의 백성이 경험한 바로 그 하느님이시다. 이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참된 하느님은 바로 나이며, 나는 언제나 너희를 위해 있는 나이다.’라는 것이다. ‘너희와 함께, 너희를 위해 있는 나’로 계시된 하느님이 성서의 백성이 믿는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모세에게 계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출애 3,15). 하느님께서는 초월자이시지만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절대자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지금은 물론이고 옛 선조들 때부터 줄곧 인간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인간 역사의 동반자로 경험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자신의 영원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하느님의 그 영원성 안에서만 의미와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말해준다. 하느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내용이 출애굽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성서의 백성들이 터득한 역사적 경험이라면, 성서의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친히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당신 백성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 현존하시면서,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분으로서, 당신 백성에게 계약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이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성서 백성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은, 계시의 하느님이시요 역사의 하느님이시요 계약의 하느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시다. 초대 교회 때 번창했던 몇몇 이단들이 구약의 하느님은 악한 하느님이고 신약의 하느님은 선한 하느님이라고 했지만, 신약의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계시되시긴 했지만, 그분은 구약의 하느님과 같은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다. 이제 신약의 백성들은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또 결정적인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히브 1,1-2 참조) 자신을 드러내선 그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우리와 함께 계신(마태 1,23),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16)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이시며, 하느님 “영광의 광채요 그분 본체의 표상”(히브 1,3)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며(요한 14,10; 17,21),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한 14,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선 당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어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그러한 하느님을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렇듯 신약이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과 행하심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사실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는다(요한 1,12).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1베드 2,19),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히브 13,20). 사도 신경이 고백하는 하느님 그럼 신경은 누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 두말할 나위 없이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바로 그 하느님을 사도들은 믿었고, 사도들의 그 믿음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 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하느님은 일반적인 신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분이라고 특징지워주신 하느님이시다. 신경은 우선, 계시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며(이 점에 대해선 다음 호에서 다루겠다), 동시에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이심을 고백한다. 삼위 일체라는 표현은 성서적인 표현은 아니라 해도 세례 양식에 표현되어 있던 것으로, 신약의 하느님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또한 신경은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오로지 한 분이신 그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사도 신경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특히 죽음과 부활, 오순절의 경험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교회의 믿음을 위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드러내셨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 하느님을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하느님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생각할 수도 없다. 이렇게 세상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세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분리될 수도 없는 역사의 하느님을, 사도 신경의 앞 세 조항에서 고백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단락의 구조를 통해 하느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세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신경의 바탕은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믿고 고백한다. [경향잡지, 1993년 11월호,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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