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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리 해설: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677 추천수0

[교리 해설]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나자렛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사실은 예수의 역사에 속하는 가장 확실한 사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 서두에서 흔히 보는 구절이다. 의미하는 속 사정은 복잡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었다는 하나의 사실을 놓고, 그 죽음의 의미에 대한 해설은 무지개 색보다도 더 다양하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십자가는 사랑 때문에

 

과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 하면, 중세 켄터베리의 안셀모가 주장한 ‘보속 신학’(補贖神學)을 우선 떠올렸다. 신자들의 의식 속에도 이 사상은 깊이 반영되어 있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무한하신 하느님의 정의를 모독하게 되었고, 모독된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 길은 무한한 보속밖에 없는데, 그 무한한 보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이론이 보속 신학이다.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의 때문에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잔인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타종교를 살펴보더라도 속죄의 문제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사실이다. 절대자 신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죄인처럼 나타난다. 인간은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되는데 그 죄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속죄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타종교에서 생각하는 보속이란 보통 파괴된 대신 관계(對神關係)를 인간의 속죄 행위로써 도로 수립함을 말한다.

 

신약성서를 보면 원초적인 십자가 신학은 비그리스도교의 보속 관념과 구원 관념에 비해 혁명적이라 할 만큼 다른 출발점을 딛고 서 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로 와서 인간에게 베푸는 것이다. 인간이 잘못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노여움을 인간의 노력으로 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 친히 어버이다운 사랑으로써 잘못된 인간의 정의를 바로잡아 주신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죄인들이 찾아와 화해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을 마중 나가 화해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강생과 십자가의 중심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 라칭거는 보속 신학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십자가 신학의 중심을 설명한다. “이런 관념(보속 관념)이 아무리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그릇되었음은 마찬가지이다. 성서에는 십자가가 모독된 정의 구조의 작용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와는 정반대로 성서에는 십자가가 자신을 남김없이 주는 철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십자가를 진 그는, 그가 누구인지를,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드러낸다. 즉 십자가는 자신의 전존재가 온전히 남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표현이다”(“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장익 역, 분도출판사, 1983, 222쪽 참조).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십자가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 했던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랑이다. 십자가는 인간들이 격노하신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드리는 그 무엇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잊지 못하시고 어리석을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절대적 표현이다. 십자가는 철저히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하느님 사랑의 완성된 표현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희생 제사

 

제자들은 예수님을 반드시 오시기로 되어 있는 왕으로 여겼고, 그분이 왕국을 세우면 한자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맥없이 처형되어 죽고 말았다. 예수님이 유다 지도자들에게 잡혀 갈 때부터 ‘천재 지변이 없는 한 예수님의 생애는 끝장이 났구나.’ 하고 생각하였고, 예수님한테서 철저히 실패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에게 부활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부활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깊이 숙고해야만 했다. 이 의미 문제에 부딪힌 제자들은 부활 사건으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구약성서의 말씀들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를 재조명해 내게 된다.

 

성서를 재해석함으로써 찾아낸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렇다. 인간들은 하느님과의 화해를 얻으려고 갖가지 희생 제사를 바쳤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조건 없는 승복만이 참된 제사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이 수락은 황소나 염소의 피로 대신하고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의 손에 들린 제물을 내치고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바쳤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당신은 희생 제물과 봉헌물과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히브 10,8-10).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적 제사는 하느님 자신의 사랑이 인간적 사랑이 됨으로써 단 한 분만이 줄 수 있었던 사랑의 절대성으로 성립된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바와 같은 사도 신앙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그 헛된 소행에서, 은이나 금 같은 없어질 것으로 속량된 것이 아니라 홈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속량된 것입니다”(1베드 1,18-19). 신약 성서는 이렇게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죄의 예속에서 해방시키는 속량의 제사였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우리가 속량되었다면, 우리도 자신을 그렇게 바쳐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이것이 곧 여러분의 정신적 예배입니다”(로마 12,1).

 

 

십자가의 구원적 가치

 

예수께서 십자가를 져야 했던 이유가 바로 사랑 때문이라 했다. 사실 예수 부활 직후 초창기 전승에서부터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많은 이를 위한’ 구원의 죽음,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되었다. “실상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l고린 15,3-5). 이러한 신앙 고백문은 가장 오래 된 것 중의 하나이다. 바오로 성인은 그러한 신앙 고백문을 자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부활 직후의 공동체로부터 전해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미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체성사 설정의 말씀에서도 예수 죽음의 주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대리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되어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1고린 11,24).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또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 이어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상에 파견되신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진정한 ‘봉사’에 관해 말씀을 하시면서,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온 것이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들을 위해 하느님께 바쳐 드린 속죄의 죽음, 구원의 죽음이라는 이 해석을 부인해 버린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는 참된 봉사,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 즉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을 위한 진정한 봉사란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라 가르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마지막 죽음까지도 인간 ‘너’를 위해 내어 놓으셨다.

 

 

십자가의 삶

 

어떤 이는 “우리는 아름다운 장미로써 거친 십자가를 장식하려고 했다. 우리는 십자가의 걸림돌에서 매끄러운 구원론을 창출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십자가일 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엉성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한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외치는 암흑의 절규 속으로 우리의 몸을 던져야 한다. 하느님을 그토록 신뢰하던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겪어야만 했던 참 사랑의 결과를 우리도 받아야 한다.

 

“이 사람을 보시오!”(Ecce homo : 요한 19,5)라고 빌라도는 외치지만, 십자가의 죽음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 함께 괴로워하시고,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그 “하느님을 보시오!”(Ecce Deus)라고 외친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의 그 자리에 함께 계셨다. 당신 아들의 고통의 자리에 함께 계셨던 그 지독한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끝장나 버려는 바로 그 자리에 함께 계신다. 십자가 위에서의 하느님의 침묵은 절망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았지만, 꼭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명(神命)이다. 신약성서 곳곳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누차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길은 이 십자가의 길밖에 다른 어떤 길이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잘난 체하는 것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미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8).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선포할”(1고린 1,23) 따름이다.

 

[경향잡지, 1994년 8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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