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해설]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성소에 내리시어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 호걸이 몇몇이며 절세 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성주풀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무덤은 우리 인생살이의 마지막이다. 선친의 무덤을 정성 들여 단장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무덤을 보면서 인생 무상을 한탄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무덤도 그런가? 죽으시고 사도 신경은 “십자가에 못박혀” 다음에 “죽으시고”라 고백한다. 이 고백은 가짜로 죽었다는 구구한 의문을 단호히 일축한다. ‘가사’(假死) 상태에 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고, 심지어는 예수의 십자가를 도와 짊어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에 대신 못박혀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죽었다. 역사상의 예수라는 한 인간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으며, 그 안에서 한 인간으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아무런 고통 없이 영광스럽게 이 세상살이를 마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비웃음을 감내하며 마지막 단말마를 외치며 숨지셨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내시면서 숨지셨다”(마르 15,37). “예수께서는 다시 큰소리로 외치면서 영을 떠나 보내셨다”(마태 27,50).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어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숨지셨다”(루가 23,46). “예수께서는 ……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주셨다”(요한 19,30). 네 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죽음의 장면이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게 마련이다. 죽는 모습도 또 그 의미도 참으로 다양하다. 주위에 죽어가는 이들을 보면, 장하게 삶을 마감하는 이, 개죽음당하는 이, 심지어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에게 살해당해 죽는 이도 있다. 아무튼 사람은 죽음을 싫어하지만, 한 번 죽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는 예외가 없다. 한 번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뿌리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삶의 의미를 문제 삼는 것도 사실이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지만, 죽음의 의미와 삶의 의미는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죽음은 삶에 그 의미를 부여해 준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산다는 것에 대한 참된 가치를 발견하게 되니까 말이다. 예수님도 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죽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장한 죽음을 맞이하셨고, 그러한 죽음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심으로써 우리도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장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신 그분의 모습보다 더 값진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은 그분의 죽음에 영원한 가치를 안겨 주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묻히셨으며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 삼베를 사가지고 가서 그분 시선을 내려다가 삼베로 싼 다음, 바위에 뚫린 무덤에 안장하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놓았다”(마르 15,42 이하 병행).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분을 장례 지내는 모습이다. 사도 신경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라고 고백함으로써 나자렛 예수라는 한 인간의 역사가 골고타에서 역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끝장을 드러냈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느 인간처럼 예수님도 당시의 장례 풍습에 따라 무덤에 매장되었다. ‘죽음’과 ‘매장’은 그분의 완전한 인간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으로 탄생하신 그분은 가짜로 인간과 친한 척하신 분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이 되신 분, 인간이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가신 분이시다. 즉 인간 삶의 종착점이요 인간 한계 상황에도 인간과 연대를 맺고 계신 분이심을 말한다. 죽음까지 함께하는 것이 참사랑이요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다. ‘죽었다’ 그리고 ‘묻혔다’란 이 두 마디는 죽은 이의 마지막 역사를 말해준다. 묻어 주는 것은 남아 있는 산 사람이 죽은 이를 위하여 하는 마지막 봉사이다. 죽은 이는 묻힘으로써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는 하직을 고하여야 하며, 그가 살아 있었을 때 누리던 화려한 경력도 활동도 다 옛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은 끝장이다. 예수께서는 땅에 묻히심으로 이 인간의 끝장도 마다지 않으셨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도 신경은 계속하여 우리를 암울하게 하고, 마음이 터지도록 답답하게 만든다. 희망을 말살시키고, 다시 살아 보겠다고 고개를 쳐드는 우리의 삶에 대한 애착을 철저히 봉쇄해 버리는 듯하다. 십자가의 몸서리치는 무서운 고통, 생각만 해도 아찔하여 질식할 것만 같은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벗들과 영원히 갈라놓기 위해 자기 존재를 매장시켜 버리는 묻히심, 이젠 세상을 향한 문은 육중한 바위 덩어리로 막혀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죽음의 세계로 자신을 내려보낸다. 그의 절규는 메아리마저 끊긴 죽음의 세계로 맥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마치 아궁이 모양 벌어진 저승 사자가 혀를 날름거리며 집어삼키려 덤벼드는 죽음의 세계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인간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도대체 누구를 믿고 기대야 하는지? 딱하디 딱한 상황, 하느님의 힘마저 무력해 보이는 상황에 사도 신경은 “고성소에 내리시어”를 들려준다. 고성소(古聖所)란 말은 의로운 옛 사람들이 하느님의 날을 기다리는 곳이란 뜻이지만, 이 말은 ‘죽음의 세계’를 지칭하는 셰올(Sheol)이란 히브리 말이나 하데스(Hades)라는 그리스 말에서 온 말이다. 아마도 ‘저승’이나 ‘명부’(冥府)라는 말이 그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고성소라고 번역한 것은 그리스도교 전승 안에 내려오던 신학적 해석이 부여된 결과라 하겠다. 아무튼 “고성소에 내리시어”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원래 부활의 희망을 목전에 두고서, 예수께서 셰올에 들어갔음을, 참으로 죽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고성소에 내리시어”를 대개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한다. 하나는 “고성소에 내리시어”라는 신앙 고백을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후의 전투로 보는 해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 사탄의 세력, 죽음의 세계와 전투를 감행하셨고 마침내 부활로써 승리를 거두신다. 이러한 승리는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옛 계약의 의로운 자들에게 구원의 해방을 안겨 준다. “사실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된 것은……”(1베드 4,6). 구세주를 애타게 기다렸던 그들, 비록 하느님을 뵈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에 있던 그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심으로써 그들의 희망을 꺾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해방을 선포하셨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도대체 죽음의 세계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죽음의 세계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등을 생각한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우리 가운데 없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는 이렇소.’라고 우리에게 설명을 해줄 사람은 없지만, 사도 신경이 왜 그냥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다음에 부활로 넘어가지 않고 “고성소에 내리시어”라고 하였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죽음의 세계를 해석해 보게 된다. 죽음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 죽음의 세계는 하느님께로부터 격리를 뜻한다. 죽음은 하느님과 맺은 모든 관계가 끊긴 철저한 고독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셰올에 내리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철저히 하느님과 단절을 의미하는 인간의 극한 상황도 체험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는 고독의 절규는 죽음의 세계에서도 메아리쳐 오고 있다. 이 두 상황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너’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독은 무엇이며 고독의 상태란 무엇인가? 고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지옥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고독은 인간에게 두려움만 줄 뿐이다. 그런 고독의 깊은 구렁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내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나를 잡아 주고 나를 껴안아 준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과 기쁨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바칠 때 다음의 시편을 읊는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시편 130편 참조).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편 23편 참조). 위의 두 해석은 상반되는 견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 해방의 넓이와 깊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준다. 즉 그리스도의 해방의 역사, 구원의 역사에서 배제되거나 제외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 혜택은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이건 그리스도 당대의 사람이건, 후대의 사람이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진다. 구원은 보편적이다.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나와 더불어’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부재의 극치를 이루는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곧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4,9)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벗이시다. 죽음의 세계까지 우리와 동행하시고, 죽음의 골짜기를 함께 지나 우리를 부활의 광명으로 이끌어 주신다. [경향잡지, 1994년 9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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