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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리 해설: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사함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3,117 추천수0

[교리 해설]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사함

 

 

‘한민족공동체’ ‘인류공동체’란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은 석연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민족이나 인류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걱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정의와 평화가 깃들인 공동체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논리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 어떻게 공동체가 존재하겠는가?

 

 

모든 성인의 통공

 

사도신경은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에 이어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거룩한 교회 안에 신도들의 거룩한 사귐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신도들의 거룩한 사귐이 있을 때 거룩한 교회는 구체화된다. 신도들의 거룩한 사귐은 교회가 새롭게 추구하는 이상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 사이에는 당연히 거룩한 사귐이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몸에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참된 사귐이 무엇인지를 잘 표현해 주었다. “마치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실상 우리는 모두 한 영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며… 모두가 한 영을 받아 마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여러분 하나하나는 그 지체들입니 다”(1고린 12,12-31 참조).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은 ‘나’라는 한 존재가 살아가도록 각각 맡은 일을 한다. 같은 생명, 같은 호흡, 같은 영양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호흡과 영양으로 유지되는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를 묶어주는 일치의 끈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또한 몸이 온전하기 위해선 지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존재란 아무도 없다. 살아있는 하나의 세포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체들은 각자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도와준다. 이를 깊이 생각한다면 신도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형제적인 공동체로 소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사도 2,44-45). 우리 교회는 사귐과 나눔과 섬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교회다. 그런 교회가 곧 ‘모든 성인의 통공’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울상이 되어 돌아가던 부자청년의 모습에 연연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물러갔다. 사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마태 19,16 이하).

 

‘모든 성인의 통공’에는 현재 지상에 살아있는 이들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과 또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이들까지도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인들의 중재를 통해 더욱더 친밀하게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선조들과 사랑하던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한 몸을 이루고 있기에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 천상 성인들의 기도가 지상의 신도들한테 유익하듯, 죽어가는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지상 신도들의 기도가 왜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겠는가?

 


성체성사는 모든 성인 통공의 원천

 

동방교회의 전통으로 보아 ‘성인들의 통공’은 원래 성찬의 거행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라틴어 ‘상토룸 콤무니오넴(Sanctorum communionem)’이란 말은 ‘성인들의 통공’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거룩한 것들의 친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거룩한 것은 성체를 가리킨다. 동방교회 사제들은 성찬을 거행할 때 성체를 들어올려서 “거룩한 것은 거룩한 자들한테”라고 외친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 안의 친교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친교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교회)은 그리스도의 몸(성체성사)으로 배양된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신도들이 함께 모여 성찬을 거행하였고, 성찬을 나누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특정처럼 내세웠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사람들이 하나의 운명, 하나의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셨다. 그런 사상은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맺는 친교가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6-17).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가 교회의 생명을 기르는 그리스도와 일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맺는 일치임을 말한다.

 

주님의 명에 따라 성찬을 거행하려고 모인 초대교회 공동체는 분명히 서로서로 도와주는 살아있는 공동체였다. 거기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언제나 있었다. 특히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버림받은 이들, 실패한 이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성찬 공동체였다. 성인들의 통공은 바로 이런 현실적인 신앙실천의 요소가 강조된 신앙고백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대형화하고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그 결과 서로를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은 교회에서도 설자리를 찾지 못하는 아픔을 맛보게 한다.

 

 

죄의 사함

 

사도신경에 나오는 ‘죄의 사함’은 세례성사와 관계된다. 니케아 신경은 분명하게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성세를 믿으며”라고 그 관계를 밝히고 있다. 세례와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강하게 부각된 주제이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사도 2,38).

 

죄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배신하여 그분과 친분을 끊어버리는 것이고,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 속담은 다른 의미이지만, 분명한 것은 죄짓고는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죄란 자신만을 생각한 나머지 상대방을 저버리는 배신행위로서 사랑을 파괴시켜 버린다. 배신자는 사랑의 파괴자다. 그러므로 파괴된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선 회개와 화해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죄의 용서는 성서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구약(이사 27,9; 59,20-21; 예레 31,31 이하)에서 죄의 용서는 새로운 계약과 결부되어 있다.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택한 백성들의 죄가 용서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과 백성 간의 관계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사상을 바오로 사도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로마서 11장 26-27절은 이사야서 59장 20-21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 구원자가 시온으로부터 와서 야곱으로부터 사악함을 치워 없애리라. 이것이 곧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과 맺을 나의 계약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죄인을 용서하는 자비로우신 분으로 소개하신다. 탕자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품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루가 15,11-32 참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수난에 있어서도 죄의 용서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잃은 양의 비유와 주의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죄를 용서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가 23,34)라고 기도하시면서 용서를 청하셨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삶의 출발이다. 용서를 받아 새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는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묵은 인간은 소멸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되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게 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오로는 “몸도 하나요 영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입니다.”(에페 4,4-5)라고 하셨다. 유일한 세례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한 교회의 몸안에 합체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세례의 삶이어야 한다.

 

[경향잡지, 1995년 4월호, 하성호(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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