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해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신부님. 육신이 정말 부활하나요? 두렵고 무섭습니다. 이 몰골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합니다. 심하게 일그러진 내 흉칙한 얼굴을 가지고 또 살란 말입니까? 차라리 저 세상도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은 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거예요. 괴로울 뿐입니다.” 호기심 찬 물음들 사도신경은 마지막으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이 구절에서 예비자들은 많은 물음을 던진다. 죽을 때의 모습으로 부활하느냐? 매장하면 살은 다 썩는데 어떻게 그 썩은 몸이 재결합할 수 있느냐? 화장하면 어떻게 되느냐? 몇 천 년이 지나도 아직 육신의 부활을 믿을 만한 근거가 없지 않느냐? 저 세상이란 없는데 괜히 죽음이 두려우니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냐? 옛 사람들이 천국이라 부르던 하늘을 우주인들이 확인한 결과 거기엔 하느님이 없다는데 도대체 육신의 부활이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냐? 등등. 이러한 물음들은 육신의 부활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보려는 시각에서 나온 것들이고, 한결같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생살이의 마지막인 죽음에 대한 물음들이다. 인간은 창조된 존재이다. 한 번 시작되었기에 한 번 죽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다. 죽음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해야 하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이다. 그래도 인간은 누구나 장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꿈꾸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많은 재물과 많은 자식을 둠으로써, 또는 자신의 명성을 후대에 남김으로써 자신의 생명이 연장된다고 여겼다. 빽빽하게 치적을 새긴 비석이나 바위에 새겨진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깔고 있는 물음은 죽음이 아니다. 한마디로 영원한 삶과 구원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인간의 간절한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죽음을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믿고 또 희망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궁극적인 우리 희망에 대한 물음이다. 육신 부활에 대한 신앙 내용 어려서 교리를 배울 때 천주교 신자는 시체를 땅에 묻어야지 화장을 시키면 안된다고 배웠다. 공심판 때 육신은 다시 살아나가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에 태우면 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부활할 수가 없다고 서툰 교리 선생님이 자신있게 가르쳐주었다. 육신의 부활은 과연 영혼과 분리된 썩어버린 살덩이의 소생을 말하는가? ‘육신의 부활’은 사체의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니케아 신경은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고 밝힌다.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소멸하는 육신이라는 요소와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히브리적인 사고에 따르면 인간이란 온전한 하나의 통합된 인격체이지, 결코 영혼과 육신으로 분리되는 반쪽과 반쪽이 결합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러기에 성서사상의 온상인 히브리적 사고에서 본다면 ‘육신의 부활’이나 ‘죽은 이들의 부활’은 다 같이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산 한 인격체 전체의 부활을 의미한다. ‘육신의 부활’이라 해서 인간의 반쪽은 이렇고, 다른 반쪽이 저렇다는 반쪽 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육신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 신앙은 한 인간의 구원과 관련되고 영원한 운명에 관한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가치가 없는 악한 것으로 보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배척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의 구원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은 영과 육의 어느 반쪽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간, 즉 온전한 인격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귀신의 구원이나 시체의 구원이 아닌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영과 육이 결합하여 하나의 구체적 인격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인간의 육신은 덧없는 먼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인격체임을 이 지상에 드러내는 하느님의 은총의 구체적인 그릇이다. 성서의 가르침 그렇다면 죽은 자의 부활이 과학적인 증명으로 해결되는 문제인가?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의 바탕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역사 안에 사셨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운명이 인간의 운명이 됨을 뜻한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이가 죽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22). 거듭 바오로 성인은 우리의 부활은 우리의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게 되는 신비임을 말씀하신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고린 15,54).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분은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 당신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복음서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다룰 때 살펴본 바와 같이, 육신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의 제한에 속하는 사건이나 생물학적 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주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부활’이라는 신앙고백이 표명하는 인간의 부활도 이 세상의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 속하는 구원 사건이기에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사건이다. 우리의 부활은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로 해석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부활신앙은 결국 살아계신 그분에 대한 믿음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로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마태 22,31-32). 그래도 인간은 눈으로 보고 싶어한다. “그러자 부자는 ‘안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저들에게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에게 ‘저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루가 16,30-3l).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육신의 부활’이라는 사도신경의 신앙은 “영원한 삶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이는 육신의 부활에 따른 피안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의 운명에 참여할 때 영원한 삶이 은총으로 베풀어진다. 이를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운명에 참여하게 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입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없다면 지금의 지상적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꾸로 이 지상적인 삶이 허무하게 취급되는데 저 세상의 삶은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승의 삶은 저승의 삶 때문에, 저승의 삶은 이승의 삶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 둘은 죽음으로 단절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는 삶이다. 영원한 삶과 지상적인 삶이 구분은 되지만 서로 대립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승의 삶은 저승의 삶을 예고해 주고 저승의 삶은 이승의 삶을 밝게 비추어준다. 우리는 언제나 종말의 삶을 살아간다. 영원한 삶의 보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 이런 관계는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고통으로도 단절될 수 없는데(로마 8,35),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우리를 영원한 삶의 운명으로 끌어줄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빛을 비추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영원을 희망하려 노력한다. 장례미사 때 우리는 “주여,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하고 기도한다. 이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난 한 사람의 죽음을 처리해 버리는 마지막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이들의 신앙고백이다.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을 잊어버리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그들을 당신 말벗이 되게 하신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 이번 호로 사도신경 해설을 마칩니다. 그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바쁘신 가운데 옥고를 보내주신 하성호 요한 신부님(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1993년 9월호부터 연재된 사도신경 해설은 곧 단행본으로 펴낼 예정입니다. [경향잡지, 1995년 5월호, 하성호 요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