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5)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의 부재
공동선 향한 연대와 민주주의 위해
지난 호에는 대중매체가 진리와 자유, 정의와 연대에 기초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사회는 그런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있음을 다뤘다. 교회의 이 가르침은 대중매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리고 일선 사목현장에서도 적용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이야기도 못 하나
본당의 마을(구역) 모임이 있었다. 평범한 본당 사제라면, 그리고 구역과 반모임에 참여하는 교우라면 그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마을 미사를 봉헌한다. 성당이 아니라 집에서 이웃으로 알고 지내던 교우들을 만났으니 분위기는 사뭇 정겹다.
필자에게는 특히 무릎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계신 모습이 제일 따뜻하다. 음향시설도 없고 성가대도 따로 없지만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이나 부르는 성가는 성당에서 봉헌하는 미사 때와는 다른 경건함을 불러일으킨다.
미사를 봉헌한 다음 마을 교우들의 친교 시간이 이뤄진다. 이 친교의 시간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는 모습이 있었으니, 바로 남녀유별에 관한 것이다. 형제들은 형제들끼리, 자매들은 자매들끼리 마치 선으로 그은 것처럼 따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절대로 섞이는 법이 없다. 지금은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는 전에 사목하던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제자매 사이에 성별의 유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차이가 있는데 식탁 분위기의 차이가 그것이다. 대체로 자매들 사이에는 이야기가 그치지 않지만, 필자가 앉아 있는 형제들 사이에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 분위기를 살려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교우가 없다면, 어색한 분위기인 경우가 많았다. 형제들 식탁에서의 어색함의 근본 원인은 대부분 필자에게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필자는 강론이나 교리 시간이나 훈화, 혹은 회합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세상'에 관한 복음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사제들은 하느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 첫째 직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기도 하다(「사제생활교령」 4항 참조).
그러나 교우들 가운데 "신부님은 왜 항상 세상 이야기만 하세요"하고 분명하게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필자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을 모임에서 형제들끼리 앉은 식탁에서의 어색함의 배경이기도 하다. 본당 사제의 '세상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자칫 모처럼의 정겨운 모임을 망칠까 봐 그 이야기를 주제로 꺼내지 못하는 것 같다.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으로 만드는 공동선
흔히 사람들이 처신의 정설(定說)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이 있다. 친구들과의 대화 혹은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반드시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필자는 그 같은 정설이 자리 잡은 데에는 사상 및 정치의 근대화(민주주의)에 저항하려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추측한다. 시민으로 하여금 정치를 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시민으로 하여금 종교적 진리를 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말이다.
주권이 왕(王)에서 민(民)에게로, 그래서 왕국(王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이행 과정을 가로막으려는 의도, 교권이 '교계제도'에서 '하느님 백성'에로의 이행 과정을 가로막으려는 의도 말이다. 혹은 '폐쇄적 지배집단'이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려는 의도 말이다.
이 글은 '사제의 세상 이야기' 자체의 시시비비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체험하는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의 부재의 심각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 또 집단과 집단 사이에 대화와 소통, 협력과 존중이 없다면 그 관계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공동 운명체라고 할 수 있으며, 대화와 소통 없이 어떻게 공동선을 향해 연대할 수 있으며, 협력과 존중 없이 어떻게 참된 사회화를 향해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때로는 더딜 수도 있고, 때로는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공동선과 참된 사회화는 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함께 온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한올 한올 엮어야 할 옷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참된 민주주의의 길이며, 불순한 의도(?)에 맞서는 길이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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