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2) 독일 ‘라이파이젠’ 시장
교회정신 바탕 협동조합 근간 만들어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견실한 성장세를 보여 부러움을 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독일입니다. 유럽발 재정위기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일은 탄탄한 경제력으로 유럽의 ‘소방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저력은 지난해 2월 말 기준으로 독일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 2598개의 경제사업 협동조합, 1255개의 시민은행(Volksbanken)·신용협동조합, 904개의 산업별 협동조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수치는 독일 국민 4명 중 1명은 협동조합 조합원이며, 독일 경제의 기반이 사실상 협동조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독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의 독일을 일궈낸 뿌리에 협동조합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자 독일도 이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변국에 비해서 산업화 과정이 늦었던 독일은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자본주의 대량생산 전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유로운 자영농민층이 주체가 되어 아래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봉건적 토지소유자가 지배 권력자와 야합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도시의 영세 독립 소생산자들과 농촌의 소작농들은 불가피하게 상업자본가의 고리채(高利債)에 의존해야 했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7년에 대기근이 강타하면서 독일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준 이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이었습니다. 1849년 라인강 중류 농촌지역 바이어부쉬의 시장으로 부임한 라이파이젠은 농민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원인을 찾게 됩니다. 라이파이젠 시장이 찾아낸 가난의 뿌리는 고리채였습니다. 봄에 농사대금을 고금리로 빌려 쓰다 보니, 가을에 수확한 농산물 대부분을 빚과 이자를 갚는데 갖다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라이파이젠 시장은 가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방안으로 마을 기금을 조성해 굶주린 주민들에게 곡식을 외상으로 나눠줬습니다. 1849년에는 프람멜스펠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해 농민들이 가축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조합원 60명이 무한연대책임으로 돈을 빌려 가축을 사고, 5년 동안 나누어 갚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는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라이파이젠은 그 시대의 가난한 이들인 농민을 마음에 품었던 것입니다. 라이파이젠의 주도로 농민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용협동조합은 1862년 라이파이젠은행(Raiffeisenbank)으로 성장했습니다. 라이파이젠 신협의 성공은 삽시간에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의 농촌 지역으로 퍼져나가 고리채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고치고 다듬은 100줄의 법률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단 한 줄이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고 말했던 라이파이젠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그대로 협동조합에 결합시켜 오늘날의 협동조합의 근간을 만들어 ‘협동조합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분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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