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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39: 성령은 현실이며 체험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12 조회수3,319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39) 성령은 현실이며 체험이다
 
샘솟는 물처럼 솟구치는 성령, 새 마음으로 청하자



■ 체험으로 만난 성령

흔히, 누가 신앙체험 증언을 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들으면서 “알렐루야, 아멘!” 하며 맞장구를 치고,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하며 믿음을 다져둔다. 이와 반대로 그 체험을 주관적 심리놀음으로 치부하며 값싼 저급 영성으로 간주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물론, 체험 추구에만 골몰하는 이들은 광신도적 성향에로 기울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체험 추구가 몽땅 잘못된 일이라고 매도하는 것도 일방적 처사다. 신앙은 엄연히 상상이 아닌 현실이며 체험이다. 그 중심에 성령이 있다.

나는 성령을 대학생 때 처음 만났다. 아무것도 모를 때였는데, 성당에서 성령세미나 한다기에 동네 청년들 따라서 갔다. 그때 봉사자가 그룹 나눔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안수 받을 거예요. 여기 여러 은사 중에서 하나를 고르세요. 욕심 많이 부리지 말고 하나만 골라서 안수 받을 때, 그걸 집중적으로 주님께 청하세요. 그리고 그 은사 언제 받을지 기다리지 말고, 안수 받고 나서 바로 받은 걸로 알고 써먹으세요.”

참고로, 성령은 안수를 통해 새롭게 받는 게 아니다. 성령을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안수다. 아무튼 그때 학생인 나한테 어울리는 은사가 뭘까 고민하다가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를 청했다.

“딴 거는 주지 마세요. 전 이제 공부만 열심히 할 테니까 지혜하고 지식만 주세요.”

세미나 이후, 나는 바로 교리교사가 됐다. 그리고 달라졌다. 이해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그때 내 교리를 듣고 수도자 되기로 결심한 학생이 제법 많다.

이후 나는 믿음의 은사를 청했고, “청한 것은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는 말씀대로 믿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둘씩 은사계발을 시작했고,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써먹는다. 성령은 나에게 고갈되지 않는 능력의 원천이다.

성령은 지치지 않게 해 주는 영이기에 이사야 예언자는 말한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31).

이처럼 성령은 우리 안에서 약동하는 기운이다.
 

■ 성령강림

사도들이 본격적으로 성령 강림을 체험한 것은 언제였을까.

성경은 성령의 파견에 대해 두 가지 전승을 전해 준다. 요한은 성령을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로 묘사하며 루카는 성령이 교회의 창립 주역임을 강조한다.

먼저,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 당일에 성령을 보내신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숨어 있던 다락방에 나타나셨다. 그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하고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용서해 줄 것을 명하셨다. 그때 바로 성령이 임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맛보기격으로 성령이 주어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 후 50일째(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것으로 보도한다. 성령강림으로 드디어 교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성령강림일은 교회 창립일이다. 예수님이 생전에 메시아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그 조직의 뼈대를 형성해 주셨는데, 십자가 사건으로 와해되었던 공동체가 부활 후 성령이 오심으로써 마침내 신앙 공동체 곧 교회가 태어났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교회의 탄생과 성장의 주역임을 기술한 성경이다. ‘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활약상을 가리키는데, 이 성경은 성령께서 사도들을 감독하고 움직이게 하시어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을 주도해나가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1,8).

이처럼 사도행전이 기술하는 성령은 특히 선교하는 교회의 원동력이시다.

무엇이 맞는 것인가? 이 두 기록은 서로 보완적이다.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은 권한위임의 근거가 되셨고, 신자공동체에 임한 성령은 교회의 생명력이 되셨다고 볼 수 있다.
 

■ 성령이 임할 때

그런데 이 성령이 임할 때 그것이 성령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표식이 있다.

첫째, 성령은 불꽃 모양의 혀처럼 임한다(사도 2,3 참조). ‘불타는 떨기나무’(탈출 3,2 참조), ‘불기둥’(탈출 13,21), ‘강력한 권능의 불길’(1열왕 18,37-38 참조) 등은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잘 표현해 준다.

불길처럼 오시는 성령은 정말 뜨겁고 한번 타면 꺼지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슴이 한 번도 뜨거워진 적이 없는 이라면 이 성령을 한번 청해 보자. 나는 청년 때부터 그 증상을 늘 느꼈다. 기도하다가 좀 있으면 뜨거워지는데 이는 사랑의 뜨거움이다. 뭐가 그냥 속에서 불타면서 좋아서 주체할 수가 없다. 딴 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신학교에 간 사람 치고 이렇게 홀리지 않고 가는 이가 있을까?

‘불’로 표상되는 이러한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했다. 그래서 성령강림 축일에 입는 붉은 제의에는 서로에게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려는 뜻이 담겨 있다.

둘째, 성령은 바람처럼 임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예측을 불허하며(요한 3,8-9 참조), 세찬 바람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다(사도 2,2-3 참조).

성령은 여린 바람결로 날 부드럽게 쓰다듬는가 하면, 세찬 바람으로 내게 휘몰아쳐 내 안의 모든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신다. 혹은 나를 움직여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밀어붙이신다. 성령은 정말 자유롭게 오고가고 하신다. “나 지금 간다~” 하고 신고 안 하고 가시고 “나 지금 온다~” 하고 오지 않으신다. 어느새 슬그머니 오시고 어느새 슬그머니 가시고. 이런 성령은 어떤 때는 위로의 바람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셨다가, 어떤 때는 강풍을 몰고 와서 시련을 몰고 오기도 하신다.

바람처럼 임하는 성령은 숨 쉴 때도 느껴진다. 앞서 확인했듯, 성령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실제로 숨을 쉴 때의 숨결, 바람결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가 숨을 쉴 때 공기뿐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치유의 영도 들이마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영을 통해 나는 내 안에 스미는 그분의 사랑을 마시는 것이다.

셋째, 성령은 물처럼 샘솟는다. 예수님은 자주 성령을 ‘물’로 표현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8-39). 산 속 깊은 곳의 옹달샘 물을 마셔본 사람은 성령이 어떻게 임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성령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솟아올라 온다. 샘솟는 생수처럼, 산속 옹달샘처럼, 사막 오아시스처럼. 이는 그냥 생명의 물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기쁨이, 생의 의욕이, 평화가 솟구치는 물이다. 갑자기 솟구치는 이 성령을 이따금 우리도 체험한다. 언제? 일례로, 집에서 설거지하는데 뜬금없이 성가가 튀어 나올 때 그것이 성령이다. 내 안에 생동하는 성령이 신이 나서 성가를 부르는 것이다. 마치 샘솟는 물처럼.

넷째, 성령은 비둘기처럼 임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비둘기처럼 임하는 성령을 보았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평화와 온유, 순결을 상징하는 비둘기처럼 성령은 부드럽고 온화하게 임한다. 설령 불 같은 성령이 임할 때도 성령은 동시에 비둘기와 같이 온화하기에 요란스럽지 않다. 그래서 비둘기처럼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온유해진다. 이 성령이 악령인지 진짜 성령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성령 기도모임에 많은 이들이 기도하러 오고 은사도 발휘하고 하는데 가끔가다 보면 은사 싸움을 한다. 누구 것이 더 센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누구 은사가 진짜 은사냐 하면, 온유한 영이 진짜고 우악스러운 영은 가짜다.

이렇게 임하시는 성령을 새 마음으로 청해보자.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혀가 침묵해도 소망은 늘 기도합니다. 항상 바란다면 항상 기도하는 셈입니다. 자면서도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소망이 차갑게 식지만 않았다면….”

핵심은 이것이다. 누가 성령을 많이 받는가? 소망을 많이 하는 이다. 하느님은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래, 그래” 하고 성령을 주신다. “난 필요가 없어요” 하며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그래, 그러면 네 뜻대로” 하시며 성령을 주지 않으신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13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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