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14) 네덜란드 협동조합은행 라보방크
세대 뛰어넘는 신뢰와 협력의 힘
일반적으로 협동조합을 말할 때 흔히 소규모 공동체 기업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기업이라고 해서 모두 작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전 세계 300대 협동조합기업들의 경영실적을 집계해 발표하는 ‘글로벌 300’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현재 ‘글로벌 300’의 총매출은 무려 1조6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세계 9위 경제대국인 스페인의 국내총생산을 능가하고, 8위인 러시아에 조금 못 미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대규모 협동조합기업이 가장 많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는 역시 협동조합 전통이 뿌리 깊은 농업입니다. 농업분야 협동조합 대기업들의 총매출은 4720억 달러로 ‘글로벌 300’의 28.85%를 차지합니다. 농업 다음으로 규모가 큰 분야는 금융으로 ‘글로벌 300’ 협동조합기업들의 총매출은 4300억 달러로 전체의 26.27%에 이릅니다.
‘글로벌 300’에 속해 있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은행’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네덜란드의 라보방크(Rabo bank)는 우리나라 농협중앙회가 50년 만에 사업구조개편을 준비하면서 벤치마킹할 정도로 모범적인 협동조합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가톨릭 신자인 네덜란드에서 최대 은행그룹인 라보방크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뢰와 협력으로 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조합원 180만 명, 48개국의 고객 1000만 명, 직원 5만8700명. 자산 6525억 유로(약 959조 원). 2010년 말 라보방크가 만든 성적표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부심이 녹아있습니다.
네덜란드 경제를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라보방크는 19세기 중엽 독일 농촌에서 시작돼 큰 성공을 거둔 라이파이젠(Raiffeisen) 신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898년 가난한 농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115년의 역사를 지닌 라보방크의 조직은 역피라미드 형태입니다. 협동조합 이사장이 맨 아래에 있고, 조합원이 제일 위쪽에 있습니다. 1개의 중앙 라보방크가 아래쪽에 있고, 141개의 지역 라보방크가 그 위에 있습니다. 라보방크 관계자들은 “우리는 141명의 어머니와 1명의 딸로 구성돼 있다”고 자랑합니다. 지역단위의 라보방크들이 어머니이고, 중앙 라보방크가 딸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141개 지역은행은 12개의 지역대표자회의로 묶이고, 이 12개의 지역대표자회의에서 6명씩 선출해 중앙대표자회의(72명)를 구성합니다. 1년에 4번 열리는 중앙대표자회의에서는 이사회의 주요 정책을 심의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합니다. 경영은 전적으로 전문경영인이 맡아서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라보방크의 이사장이 무보수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장이 높은 보수를 받으면 결국 조합원의 경제적 부담으로 돌아가고 자리다툼이 빚어질 수 있다는 염려에서 출발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라보방크는 창립 이래 지금까지 100% 무배당 원칙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선배 세대가 라보방크의 활동으로 불어난 이익잉여금을 나눠가지지 않고 후배 세대와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에 대비해 온전히 물려준 것입니다. 세대를 뛰어넘은 이러한 협력의 힘은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속에서도 라보방크의 안정성과 건전성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세대 간 협동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라보방크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펼칠 수 있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가톨릭신문, 2013년 10월 27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