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56) 오- 그 아름다운 날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준비하는 자세
■ 식지 않는 궁금증
몇 년 전 <2012>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되면서 ‘종말’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뜨겁게 한 적이 있다. 마야문명의 예언달력 계산에 따를 때 2012년은 우주대이변이 발생할 예측연도라는 해괴한 주장에 일부 귀가 얇은 사람들은 사재기와 피난처 준비로 부심하기도 했다. 하도들 요란하니까 모 신문사에서 전화인터뷰 요청이 왔다. 영화의 파장과 종말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묻는 물음이 주된 궁금증이었다. 나의 답변은 비교적 짧았다.
“그 영화가 두려움을 몰고 온 모양인데, 가톨릭은 종말을 희망사건으로 기대합니다. 종말은 궁극적으로 파괴의 사건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하는 사건입니다. 자연재해니 전쟁이니 하는 것들은 단지 그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비관론이 아니라 낙관론입니다. 왜냐하면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의 말이 “여러 종교의 견해를 취합한다”고 했는데, 다른 종교에서는 어떤 답변이 나왔는지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뚜렷이 느껴지는 것은 종말에 관한 식지 않는 궁금증이다. 졸저 「잊혀진 질문」의 원천이 된 고 이병철 전 삼성 창업주의 24가지 질문 가운데에도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가 끼어 있었을 정도니.
기실, 인류 종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구약 시대부터 시작되어 지속되어 왔다. 특히 ‘1백 년’ 시간 단위의 끝이나 ‘1천 년’ 주기(밀레니엄)의 마감을 앞두고 여지없이 갖가지의 종말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리다 1987년 32명이 집단 자살한 오대양 사건, 요한 묵시록의 예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가 1000년 뒤에 재림해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세상이 끝나거나 무시무시한 대이변이 일어난다며 이날을 준비하라고 주장하는 천년왕국 신봉자들, 예수의 재림 시기를 1874년, 1914년, 1918년, 1925년, 1966년, 그리고 1975년으로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공언했지만 모두 빗나간 ‘여호와의 증인’ 등의 예를 잊지 말아야 한다.
■ 시인의 종말예감
‘종말’은 시인에게도 외면할 수 없는 주제다. 몇 년 전 고 서정주 시인의 시 <단편(斷片)>을 우연히 읊조리다가 눈물을 억지로 참은 적이 있었다.
“바람뿐이드라. 밤허고 서리하고 나 혼자뿐이드라.
거러가자, 거러가보자, 좋게 푸른 하눌속에 내피는 익는가.
능금같이 익는가. 능금같이 익어서는 떠러지는가.
오- 그 아름다운 날은 … 내일인가. 모렌가. 내명년인가.”(서정주, 「화사집」에서)
고독의 전율이 느껴지면서도 또한 통쾌하고, 처량맞게 들리면서도 또한 웅혼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독백이 내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나는 그날 이렇게 메모를 남겼다.
“노상 뻑적지근한 향연을 즐기듯 살고 싶어 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람임을 깨닫게 되는 날, 그 날은 필경 생의 베일이 벗겨지는 날일 터다. 겹겹의 먹구름을 뚫고 마침내 햇살이 쨍하니 비춰오는 날일게다.”
그날은 과연 언제 올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유치원 놀이터에서 휑한 고독을 조숙하게 느끼는 아이의 어느 날 오후일 수도 있고, 애석하게도 임종이 코앞에 왔는데 아직 그날을 끝내 못 만날 수도 있다.
시객(詩客) 서정주가 시간의 허공 속에서 우두커니 만난 밤, 서리, 그리고 혼자라는 자각, 그것은 차라리 존재로부터 내려오는 새벽 감로수일 터다.
그러기에 허무의 밑바닥에서 생의 욕망은 벌써 일어나 ‘거러가자, 거러가보자’를 노래한다. 기개가 장하다! 자신 안에 미친 존재감으로 흐르는 ‘피’가 저 ‘좋게 푸른 하눌속에’서 능금같이 익어 떠러질 그 지대(zone)에까지 가볼 심산이니.
이윽고 시객(詩客)이 미리서부터 예감하고 기대하는 ‘오- 그 아름다운 날’은 나의 갈망으로 남고, 우리 모두의 희구로 약동한다.”
시인이 읊었던 ‘오- 그 아름다운 날!’, 이날을 우리는 종말이라 부른다.
■ 확실한 세 가지
시인이 저렇게 설렘으로 고대하던 그 날을 일반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기다릴까. 종말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일까.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날을 한평생 기다려 오던 희망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정녕 환희의 날이 될 것이되, 그날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혹여 두려워하던 역천(逆天)의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을 명징하게 알지 못하던 동양의 현자들도 이 사실만은 엄중하게 설파하였다. 자고로 우리 민족은 자녀들에게 이것을 확실히 훈육하고자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준다”고 하였다(子曰 爲善者天報之以福 爲不善者天報之以禍).(명심보감 계선편)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孟子曰 順天者存 逆天者亡).(명심보감 천명편)
종말에 관한 성경의 진술 가운데 그 뜻이 자명한 것을 추려보면 세 가지가 꼽힌다.
첫째,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 역사의 종말이든 종말의 때는 하느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둘째, 기회는 단 한 번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히브 9,27), 종말은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 ‘단 한 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말이다.
셋째, 그날 우리의 지상 삶이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 때에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마태 13,43 참조).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해서 이 이상의 것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
깨어 있다는 것은 시간을 잘 쓰면서 준비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2월 1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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