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57) 어떻게 맞을 것인가
그날만은 행복한 날이 될 수 있기를 …
■ 무신론자가 천국에 간다?
언론 매체를 통하여 거의 연일 중계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록’은 심심치 않게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일반인은 물론 가톨릭 신자들까지도 유쾌한 ‘경악’에 빠트리는 것은 이제 익숙해져 버린 일이다. 그럼에도, 2013년 초여름 쯤 언론에 보도된 발언은 강도가 셌다.
“무신론자도 선을 행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충분히 도발적인 이 언급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그 진의를 음미하는 물음을 던졌다. 무신론자가 천국에 간다? 거 재밌는데.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나는 자료를 찾아봤다. 2013년 5월 22일자 허핑턴포스트에 게재된 발언이 어느 목사님에 의해 번역되어 블로그에 올라와 있었다.
“주님은 우리를 그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우리는 주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은 선행을 베푸셨고, 우리 모두에게도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말라는 명령을 마음에 새겨놓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 이 사람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말합니다. ‘아니요, 그는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두란 가톨릭 신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합니다.
‘모두라뇨? 신부님 여기엔 무신론자들도 포함됩니까?’ 맞습니다.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 만나야 합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우리가 저곳(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기사의 번역자는 이런 견해를 표명한 교황을 이단으로 몰았지만, 실상 이는 성경의 관점, 더 정확하게 말하여 사도 바오로의 입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지는 아래에서 밝혀질 것이다.
■ 종말의 심판
사람이 죽음으로써 인생이라는 ‘시험 기간’은 끝이 난다. 그러고는 심판과 더불어 응보의 ‘영원’이 시작된다. 교회는 심판에도 공심판과 사심판이 있다고 가르친다.
공심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포함한 온 인류가 받게 되는 ‘최후의 심판’이다(요한 5,28-29 참조). 사심판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 앞에 설 때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말한다(2코린 5,10). 각 사람은 죽자마자 사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 되느냐다. 로마서 2장은 그 기준에 대해서 말해 준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세 가지 기준을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 기준은 ‘양심’이다. 이는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로마 2,14-15).
두 번째 기준은 ‘율법’이다. 이는 율법은 알지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2,12).
세 번째 기준은 ‘믿음’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이후의 기준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로마 3,21-22).
우리는 이들 사이에 등급이 있음을 보게 된다.
‘양심’이라는 기준은 주관적이며 그 기준을 통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래도 가책을 느끼고 저래도 가책을 느끼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이다.
‘율법’이라는 기준은 객관적이고 분명해서 양심보다는 통과하기가 쉽다. 그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율법으로 ‘의인’ 인정을 받는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기준은 ‘양심’과 ‘율법’이라는 기준보다 수월하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 천국에도 파노라마가 있고 스펙트럼이 있다. 시쳇말로 변두리 천국이 있고 중심부 천국이 있다는 말이다. 천사에게도 등급이 있다 하고, 성인에게도 그 그릇에 따라서 큰 성인, 작은 성인이 있다 하니 말이다. 연옥이라는 것도 그 등급 때문에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등급에서 간당간당 거리고, 턱걸이로라도 들어가려면 그 필요한 만큼 정화가 필요하다. 순수 100%이신 분 앞에 어떻게 감히 이 때 묻은 우리 육신이 설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신관리를 잘 할 필요가 있다. 이 내신관리 기록이 바로 교적이다. 천국에 가려면 두 가지를 다 내야 하는데, 하나는 세례 증명서, 다른 하나는 교적 증명서다. 교적을 보면, 교무금을 얼마 냈는지, 판공성사 몇 번 놓쳤는지, 결혼 때 혼배성사로 했는지 등 내신 성적이 다 들어가 있다.
이 세상은 정의로우신 그분 앞에 다 공평하다. 자기 믿음의 분량만큼 고대로 간다. 그러니 더 이상 이 심판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절대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
■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기도
종말을 생각할 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죽음에 대해 남긴 기도가 떠오른다. 뭉클뭉클하다. 함께 읽고 죽음 성찰과 준비를 해 보자.
“언제고 제 영혼이 이 몸을 떠나겠지요. 그게 언제일까요? 겨울입니까? 아니면 여름입니까? 도시? 아니면 시골? 낮에? 아니면 밤에? 갑자기? 아니면 천천히? 병으로? 아니면 사고로? 제 죄를 고백할 기회는 가지게 될까요? 죽어가는 저를 도와줄 사제는 있을까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그것도 제가 바라는 것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올 하느님, 그 중요한 날에 저를 당신 품으로 안아주십시오. 그날이 저에게 행복한 날이 될 수만 있다면, 다른 모든 날들이 슬픈 날이어도 좋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몸이 떨립니다만, 그래도 당신 홀로 저를 구하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하늘 나라에 대한 당신의 약속에 고정시켜 주십시오. 오, 주님, 제 발걸음을 이끌어, 영생을 향해서 곧장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로 가지 못하게 등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게 하소서.”
감동이 밀려온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다.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아는가? 어디서 죽을지 어떻게 아는가? 그러나 다른 날은 슬퍼도 좋으니 그날만은 기쁜 날이 되게 해 달라는 저 말, 멋있다. 오늘을 감사하자.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2월 23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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