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0) ‘아멘’의 영성적 의미
‘아멘’ 할 때마다 천국 희망은 우리 가까이!
■ 십자가와 문제
어려움이나 시련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십자가’라고 칭한다. 가령 남편이 속을 썩일 경우, “어유, 당신이 내 십자가야!”라고 푸념한다. 말썽을 피우는 아이에게도 입버릇처럼 “네가 내 십자가야!”라고 이름 붙인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꼭 고쳐서 말해 준다.
“말을 똑바로 해야 합니다. 그런 건 ‘십자가’가 아니라 ‘문제’예요. ‘문젯거리’란 말이죠. ‘십자가’는 신앙 때문에, 예수님이나 복음 때문에, 불이익이나 박해를 치르게 될 때, 그것을 가리키는 겁니다. ‘문제’는 기도를 통해서나 어떻게 해서든 풀어야 할 숙제지만, ‘십자가’는 피하지 않고 그냥 감당해야 하는 소명 같은 거죠.”
그렇다! 문제와 십자가는 영 다른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풀어야 하는 것이고, ‘십자가’는 ‘아멘!’ 하고 내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흑인만 다니는 성 시온 교회에서 주님 수난 주간 성목요일 예절을 진행하며 이뤄진 세족례 의식에, 유일한 백인이자 존경 받는 대법원장 올리버가 참석했다. 올리버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마르타라는 흑인 여성을 불러 발을 정성껏 씻겨 주고, 입을 맞추었다. 순간 그곳은 놀라움과 동시에 이내 숙연해졌다. 예식을 마친 올리버는 그 자리에 있던 신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마르타는 저의 집에 노예로 있는 사람입니다. 한평생 그녀는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도 넘게 씻겨 주었지요.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은 늘 괴로웠습니다. 그간의 보답이랄까요, 저는 오늘 저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피 흘리신 예수님을 따라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소식을 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법부는 올리버의 대법원장직을 박탈했다. 하지만 올리버는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참 하느님께 나아갈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올인’ 아멘이다. 신앙을 팔아서라도 대법원장직을 사려고 줄을 서는 것이 인지상정인 판인데, 올리버는 그의 표현대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거꾸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최상의 관직을 내팽개쳤다.
그는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그리스도를 거스르면서 대법원장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게 마음 편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에게 형용할 수 없는 주님의 위로와 기쁨이 늘 함께 했을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다.
■ 올인 ‘아멘!’
사도신경에서 “저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한마디로 ‘올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크레도 데움”이 아니라 “크레도 인(in) 데움”이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인’이 바로 ‘올인’이라는 의미기에, 저 고백은 “하느님께 내 삶을 몽땅 걸고 ‘아멘’ 한다”는 뜻이 됨을 앞서 여러 차례 확인하였다.
이 라틴어 전치사 ‘인’(in)은 사실적인 믿음을 관계적인 믿음으로 믿음의 차원을 끌어 올린다. 그리하여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된다. 뉴만 추기경이 말했듯이 “믿음은 우리의 온몸으로 하는 ‘실재 동의’이지 머리로만 하는 ‘개념 동의’가 아니다.”
관계적인 믿음은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 뒤에는 고백 내용대로 행하는 실천이 당연히 따라야 한다. ‘아멘’은 단순히 머리로만 하는 동의가 아니라 온 마음과 몸을 올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희망으로서 ‘아멘!’
지금까지 ‘아멘’이 지닌 속뜻을 음미해 봤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아멘의 또 다른 측면이 확인된다.
‘아멘’은 내용적으로 ‘희망’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아멘” 할 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미래의 것을 미리 당겨오는 셈이 된다. 성경은 말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여기서 믿음은 무엇인가? ‘아멘’이다. 우리는 믿을 때, “아멘” 한다. 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다. 우리가 자꾸 “아멘” 할 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현실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멘’은 희망이다. 희망에 대한 다음 성구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이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히브 6,19).
‘휘장 안’이 어디인가? 천국이다. 거기까지 닻이 놓여 있다는 말씀이다. 닻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줄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희망은 밧줄이다. 이 희망의 끈을 끌어당기면 닻이 내려진 천국까지 가는 것이다.
이 밧줄은 지상의 내비게이션보다 더 좋다. 내비게이션은 닻으로 끄는 것이 아니다. 작동시켜 한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빗나가기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닻은 줄로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다른 데로 가더라도 결국 최종 목적지로 가게 해 준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면 천국에 가게 되어 있다. “아멘” 할 때마다 이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절망에 빠졌을 때, 마지막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희망이라고 우기고 살아남는 사람입니다.”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희망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1930년대 초 미국이 심각한 대공황을 겪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공장이 밀집된 지역의 한 흑인교회를 클레어린스라는 목사가 방문했다. 그 교회 신자들은 60% 이상이 실직을 당한 상태였고, 대부분 극빈자였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찬송은 힘과 희망으로 넘쳤다. 그들의 표정에선 절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클레어린스 목사는 설교 중에 신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여러분, 지금은 대공황이고 이 나라는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실업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구요.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이 그렇게 즐겁습니까?”
그때 한 신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최고의 희망입니다.”
실낱같은 희망도 찾을 수 없던, 말 그대로 ‘대공황’의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그들이 붙잡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내게 이렇게 말한다. “신부님은 희망의 전도사군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하기를 좋아한다. “아닙니다. 저는 희망의 광신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희망이 커지는가? ‘아멘’을 열심히 하면 된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3월 1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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