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37) 유전무죄 무전유죄 세상
회장님 일당은 5억 원?
이른바 ‘황제노역’을 둘러싼 문제로 세상이 들끓고 있는 듯합니다. 모 법원장이 모 대기업 회장을 지낸 이에게 벌금 294억 원을 선고하면서 노역으로 대신할 경우 일당 5억 원으로 환산하여 49일 동안 노역하라는 판결을 하면서 불거진 ‘황제노역’ 문제는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윤리관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합니다.
일당 5만 원인 일반적인 노역으로 계산하면 27년이 넘는 세월을 단 50일도 안 되는 시간으로 때울 수 있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적잖은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형벌은 저지른 범죄에 대해 고통을 주는 속성이 있습니다. 벌금형 제도는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고 단기의 자유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따라서 벌금형은 수용시설에 보내기에는 가혹하다고 판단되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선고되고 보통 일당 5만 원의 노역금으로 환산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건에 따라 벌금형의 전체 액수만을 정하는 총액벌금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벌금을 선고받으면 30일 이내에 일시불로 완납하여야 합니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노역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부의 재량에 따라 노역장 유치기간이 정해지다 보니 하루 노역금이 고무줄 잣대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이처럼 벌금형이 노역장 유치와 연결되면 벌금형 제도의 차별적 성격과 다양한 문제점들이 드러납니다. 형사사건의 약 90%는 벌금형으로 종결되는데,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노역으로 대체하는 이들이 매년 4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은 경제사정이 힘들어 생활이 어렵거나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한마디로 돈 없는 가난한 이들은 조그만 잘못에도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게다가 강제노역 기간을 정하는데 있어서 합리적인 기준이나 규정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벌금형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선처가 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되고 마는 게 우리 사회의 모순입니다.
이와 같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사례는 우리 주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힘 있는’ 유력자들은 사안의 위중함과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려나는 반면 힘없는 서민에게는 형집행정지가 넘기 힘든 문턱이 된 지 오래입니다.
지난해 10월 법무부가 낸 ‘교도소 내 사망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교정시설 내 사망자 227명 중 37.4%에 해당하는 85명의 재소자가 형(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다가 불허되거나 심사결정이 늦어져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들 중 연평균 8명 정도가 건강악화 등으로 형집행정지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됐고, 경기불황 여파 등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 유치를 선택했다가 사망한 경우도 9건이나 있었습니다.
법률소비자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0% 정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실에 동의한다고 합니다.
정당한 경제활동이나 영리행위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을 폄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노역’처럼 공정성과 형평성이 문제가 된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제대로 펼쳐지는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 가난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사회라면 결코 공정한 사회일 수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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