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4) 8가지 참 행복 - 지복(至福)
‘행복선언’은 하느님 잔칫집으로의 초대
■ 인생 코치 예수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21세기 버전으로 풀어봤다. 마지막 글을 쓰면서는 그때그때 명징하고 신나는 영감을 주신 성령께 찬미 기도를 드렸다. 많은 독자들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격려의 말을 들었다. 쓴 사람의 보람은 그냥 읽어 주는데 있다. 그 자체로 고맙기 짝이 없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새복음화의 일환으로 기획된 신앙 재점화의 글은 계속된다. 그동안 교리 중심의 여정이었으니, 이제 예수님을 가이드로 모시고 행복순례에 나서볼 요량이다.
사실 예수님은 스승 이상의 인물이었다. 예수님은 여러 얼굴을 지니셨다.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그분에게서 50가지 모습을 포착하였다. 그중에서 나의 눈에 띈 것 몇 가지만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탈자 예수님, 나그네 예수님, 여성의 벗 예수님, 친구 사귐이 예수님, 화해 주선자 예수님, 자유인 예수님, 어린이 벗 예수님, 삶의 선도자 예수님, 이야기꾼 예수님, 광대 예수님….
여기서 잠깐 주의할 일이 있다. 예수님의 얼굴은 이처럼 다양하기에 그 가운데 한 가지 모습만 너무 강조해서 고착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이를 전제로 지금부터 독자들에게 ‘인생 코치’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예수님은 탁월한 인생 코치셨다. 예수님은 가르침의 내용도 좋으셨지만, 가르침의 철학도 독특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행복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다 인생낙오자였다는 사실이다. 통쾌한 것은 이 낙오자들이 졸업할 때는 180도로 바뀐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히 최고 스승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공포의 외인구단을 키워 명문구단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이 이상의 탁월한 선생이 어디 있겠는가!
■ 하늘의 지혜와 권위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역사적인 행복선언의 현장으로 가보자. 예수님께서 막 갈릴래아 호숫가에 마련된 자연 강단에 오르신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마태 5,1-2).
바야흐로 ‘산으로 오르셨다’! 왜 산으로 오르셨나? 이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산은 전통적으로 신적인 가르침이 내리는 장소다. 그 옛적에도 산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모세다. 왜 갔는가? 하느님 말씀을 받으러 갔다. 예수님 역시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러 산으로 갔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묵언의 행위로 이렇게 의중을 드러내셨던 셈이다. “목하 내가 주는 가르침은 내 지혜가 아니라 아버지가 주신 지혜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지혜이니라! 그러니 자세를 추스르고 들을지니라.”
이어 ‘자리에 앉으셨다’! 앉는 자세는 스승의 자세, 권위 있는 선생의 자세다. 평소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대화를 나누면서 도상의 교육을 즐기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여기에는 의도하신 깊은 뜻이 있다. “지금부터 들은 것은 내가 딴 데서 가르친 것과는 격이 다르다. 그러니 참고용으로 듣지 말고, 인생지침으로 삼을지라.”
핵심은 뚜렷하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여덟 가지 행복’은 행복의 참고서가 아니라 우리네 ‘행복교과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삶의 조건을 환히 꿰뚫어 알고 계시기에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아신다. 그러기에 그의 안내를 따라가기만 하면, 거짓에 속지 않고, 헛다리짚지 않고, 시간을 허송하지 않게 된다. 실천하지 않아도 단지 깨달음만으로도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 자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의 중심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유쾌한 삶의 혁명인가!
■ 행복하여라
여덟 가지 행복선언은 항상 “행복하여라”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스’(makarios)다. 이 말은 특히 신적인 행복, 천복(天福), 위로부터 오는 행복을 나타낼 때 쓰인다. 바꾸어 말하면 이 말은 최상의 행복 곧 지복(至福)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단어는 이 행복에 맛들이면 그동안 우리가 세상에서 누려왔던 행복은 별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암시가 된다.
이를 철학적인 용어로 ‘초월적인’ 복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초월적인 복이라는 말은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복을 가리키지 않고, 우리 안에 삼투되어 있는 차원 높은 복을 뜻한다. 곧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을 능가하는 복, 지금 우리가 피상적으로 누리는 것들을 넘어서는 그런 복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행복하여라’라는 이 선언은 벌써 삶의 목표에 정의를 내리고 출발하는 셈이다. “이제 더 이상 헤매지 마라. 무엇하자는 인생이냐? 이런 질문 던지지 마라. 두말할 필요 없이 인생의 목적은 일단 행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 그 방법이 여덟 가지가 있다.”
이런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기대하시라. 과연 그러할 것인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 행복지대에 첫발을 디뎌보자.
첫걸음을 떼기 전에 우리 생각의 지평을 점검해 보자. 이런 사유가 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본다 해서 하늘이 작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가 우물 안으로 들어가서 우물 벽의 구속을 받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물이 무슨 허물이 있으며, 또 꺼릴 것이 무엇이냐? 우물 속에서 나오기만 하면 곧 하늘이 큰 것을 볼 것이다. 이미 하늘이 그만큼 큰 것을 알면 다시는 우물의 구속을 받지 않을 것이니 도로 우물 속에 들어간들 어떠하랴.”
‘우물 안 개구리’라 해서 모두가 똑같지는 않다. 그들 중에는 우물 안에서 태어나서 산 개구리가 있고, 우물 밖에서 살다가 어쩌다가 우물 안에 들어가 못 나간 개구리도 있다.
그런데 이들 개구리가 사는 차원이 각각 다르다. 우물 안에서 태어난 개구리는 자기가 보는 하늘이 다다. 반면 우물 밖에서 살다가 들어간 개구리는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우물 밖 지혜다. 지구라는 우물 안에서 태어나 여태 살아온 독자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가르침일 수도 있다. 그러니 상상으로라도 우물 밖 세상을 짐작해 보면서 배울 줄 알아야 한다. 우물 밖을 볼 줄 아는 이 안목을 이름하여 초월적 사유 또는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가 막힌 얘기 아닌가!
우물 밖 하늘을 보고 우물 안에서 산다면 그가 그 안에서 설사 지지고 볶고 산다 해도 여유가 좀 생기고 넉넉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제시되는 여덟 가지 행복은 절대로 의무가 아니라 초대다. 잔칫집에 초대하는 것이다. 잔칫집은 즐기러 간다. 이 잔치는 누구에게나 열린 잔치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4월 13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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