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41) 세월호 참사의 추악한 이면
한국사회의 총체적 비리 드러나
지금껏 이토록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마지막까지 희망을 내려놓지 않고 어린 자녀들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는 부모와 한마음이 되어 온 국민이 통곡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온 국민의 가슴에는 지우기 힘든 상처가 깊이 새겨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시대에 보여주시는 징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많은 이들의 희생과 고통은 헛수고에 그칠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의 고통이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내 탓(Mea Culpa)’임을 되뇌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뜻과 경고를 진정으로 성찰하고 실천할 때 하느님 자녀로서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참사 소식의 이면은 파내면 파낼수록 악취가 진동하는 듯합니다.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추악한 면들이 이번 사태를 둘러싼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몇몇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한 정치·경제·사회·기업·공공기관 등의 전체적 비리와 부패임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도 잘 알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 30-37)에서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인처럼 이웃의 곤란을 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쳐버린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도 지나친 이들은 오늘날의 법 관념에 비춰보면,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하지 않음으로써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에 빠져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합니다. 제노비스 신드롬이란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걸 주저하게 된다는, 이른바 방관자·구경꾼 효과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어떠한 분석과 평가를 내놓든지 간에 우리 사회의 어떤 누구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현상의 뿌리에 자본주의의 추악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배금주의와 개인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적지 않은 모 회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신의 취미활동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쓰면서도 생명이 달린 안전교육과 훈련비용에는 그토록 인색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하니,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 할 관계당국을 비롯해 누구도 수십 년 동안 문제 한 번 제기한 적이 없다니…. 말문이 막힐 노릇입니다.
하지만 더더욱 슬프고 무서운 것은, 이런 끔찍한 사태를 낳은 정치사회적 구조와 혁신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과 개혁이 없으면 이 같은 비극이 또 반복되리라는 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웃의 고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제자들을 대피시키다 목숨을 잃은 남윤철(아우구스티노·35) 교사와 몇몇 의인들로부터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11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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