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69) 8가지 참 행복 - 슬픔 후(後)
예수님은 함께 울어주는 눈물의 위로자셨다
■ 나는 고통을 모른다
두어 주 전 친구가 상을 당했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 갔다가 청안(靑眼)의 색시와 국제결혼을 하고 그곳에 눌러 살고 있던 중, 어머니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에 급거 귀국하여 임종까지 병수발을 하였다. 마지막 가시던 날 아침 급히 연락이 왔다. 가보니 심장이 멈췄던 상태에서 심폐소생술로 박동을 살리고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은 끔찍했다. 전신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온 피부가 검붉게 타서 갈라져 있었다.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희귀병증 ‘나헬증후군’이라 했다. 겉만이 아니라 속 내장까지 타들어가는 고통이라 했다.
건드렸다하면 비명이고 움직였다하면 피부가 더 갈라지는 그런 고통을 하루 24시간씩 꼬박 두 주 이상 견뎌야 했다고 들었다. 나는 잠깐 지켜보는 것도 괴로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백만분의 1확률로 일어나는 부작용이라고 했지만, 그 약물을 복용한 사람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백만 명이 될지를 감안할 때 어쩌면 우리 의료진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증세였을 것이라고 아들은 슬쩍 귀띔을 주었다. 세례를 청하기에 마리아란 이름으로 간소하게 세례를 주고서 나는 일단 볼일 때문에 연구소로 복귀하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문득 회의에 빠졌다.
“내가 고통을 알아? 나는 고통을 모른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회의가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 고통을 모른다! 이 은혜로운 깨달음으로 인해 그나마 늦은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식사 후 처리할 일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계속 서성였다. 말 그대로 안절부절 못 하였다. 그러다 홀연 미사를 바쳐 드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때는 정확히 3시였다. 마쳤을 때는 3시 27분이었다. 그리고는 3시 34분에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방금 돌아가셨어요!”
그날은 마침 금요일이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 금요일, 그것도 정확히 3시. 그 시간에 봉헌된 미사를 노자삼아 어머니는 하늘 나라로 가셨다. 그날 이후 나에게는 물음이 하나 더 생겼다.
“그렇게 착하게 사셨다는 어머니, 그 어머니가 마지막에 봉헌한 극단의 고통! 그것은 이 세상 누구를 위한 대속의 고통이었을까?”
어제 외아들, 아니 친구를 만났다. 비행 일자 때문에 아직 국내 체류 중이었다. 얼굴이 눈에 띌 만큼 더 맑고 선하게 보였다. 금세 그 비밀이 드러났다.
“방에 혼자 있을 땐, 시도 때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이 나요. 슬픔이 북받쳐 숨도 못 쉴 것 같은 때가 많아요.”
위로가 필요 없었다. 그 자체가 위로요 은혜임을 그가 알고 있었기에.
■ 다이애나 효과
1997년 교통사고로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사망한 후, 갑자기 영국 내 우울증 환자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영국시민 대다수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던 까닭이다. 이 현상을 두고 ‘다이애나 효과’(Diana Effect)라 한다. 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치료과정인 것이다.
슬픔에는 눈물이 명약이다. 그러기에 영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모슬리는 눈물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치유의 물”이라고 말하였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월 5.3회 눈물을 흘린다는 미국 여성은 월 1.4회만 운다는 미국 남성보다 평균 5년을 더 산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미국 뉴욕에는 남자들만을 위한 아주 재미있는 가게가 있다고 한다. 이 가게는 남자들이 실컷 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올라와도 사회통념상 울음을 억제하던 남자들이 이 가게로 와서 돈을 지불하고 맘껏 혼자 울다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통할 법한 아이디어다. 남자의 눈물이 금기시되기는 어쩌면 우리네가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서양 못지않으니 말이다. 어릴 적 “사내놈이 되어 가지고서는 울기나 하고……, 쯧쯧. 너 커서 어쩌려고 그래?”라든가, “남자는 평생 세 번 우는 거야. 첫째, 태어나서. 둘째, 군대 갈 때. 셋째,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알았냐?”라는 소리 안 듣고 자란 남자가 몇이나 될까.
여자라고 이런 이야기에서 자유로우랴. 용납의 정도가 훨씬 후하게 주어지기는 했으나, 자고로 여자들 또한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전래동화 속 평강공주는 매일 울다가 그 결과로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지 않았는가.
어쨌든 앞에서 보았듯이 요즈음엔 ‘눈물예찬론’이 대세다. 심지어 ‘눈물요법’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말인즉슨,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 행복감이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눈물예찬론자들은 그 근거로 현대과학이 발견해낸 눈물의 효과를 내세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눈물은 유해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건강을 이롭게 하고, 평상심을 회복하게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다준다. 그리하여 결론은 이렇다.
“웃음이 파도라면 눈물은 해일이다.”
웃음은 우리에게 행복의 파도를 몰고 오지만 울음은 우리에게 행복의 해일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마음 놓고 실컷 울자.
■ 눈물의 위로자
예수님은 눈물의 위로자셨다. 어느 날,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을 놓고 곡을 하는 유다인들과 함께 우셨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사실 예수님은 잠시 뒤 라자로를 다시 살리기로 계획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우는 사람한테 일반적으로 제일 실용적인 위로는 무엇인가? “울지마, 울지마. 내가 다시 살려주면 되잖아~.” 그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이를 곰곰이 묵상해 봤다. 왜 그러셨을까? 이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지금 이 사별의 눈물은 라자로의 가정뿐 아니라 집집마다 시대마다 있다. 이 슬픔은 앞으로 모든 시대 모든 지역 사람들의 운명이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의 슬픔을 같이 느끼시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심으로 오늘의 우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인류의 슬픔에 동참하고 계신 셈이다!”
그러기에 집안에 초상이 났다면 기억하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러 문상객으로 오신다는 것을.
많은 형태의 죽음이 있다. 어떤 죽음이라고 더 슬프고 어떤 죽음이라고 덜 슬프라는 법은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익명의 죽음, 잊혀진 죽음, 소외된 죽음……. 다 귀한 죽음이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5월 18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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