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4) 8가지 참 행복 - 자비의 선한 부메랑
자비를 베풀 때, 하느님은 그 이상으로 갚아주신다!
■ 거룩한 탐욕(?)
요즈음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 영성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오는 8월 그의 방한을 맞이하는 신앙적 채비의 일환으로 진행 중인 PBC TV 특강 내용을 「교황의 10가지」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여 출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마치 개인 피정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성은 밝고, 깊고, 열려 있다. 그렇다면 그를 대표하는 열쇠어는 무엇일까? 후보군으로 모아진 정보량이 많아 나는 열 가지로 추려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핵심 단어는 ‘자비’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들려주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 시절 한 신부의 장례식에 얽힌 추억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티 신부님은 고해사제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신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런 신부님의 관에 꽃을 헌화하다가 신부님의 손에 쥐어진 묵주를 보았지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나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 손에 있는 묵주를 가져왔지요. 그 순간 신부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고백을 했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반만이라도 나에게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리스티 신부의 묵주가 탐났을까. 교황은 그날 이후로 그리고 교황직에 오르고 나서도, 그 묵주를 윗옷 가슴 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한다. 누군가에 대해 나쁜 생각이 들 때마다 묵주가 있는 주머니 쪽에 손을 대면 금세 자비의 마음이 회복된다는 것!
“당신의 자비를 반만이라도 나에게 주십시오.”
교황은 아리스티 신부님의 자비,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탐났던 것이다. 이것이 교황의 거룩한(?) 탐욕이었다. 그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에서 자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거의 절대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어떤 문제에 관한 상담이건 신자들과의 개인적인 대화를 똑같은 물음으로 마무리 짓는다고 한다.
“그런데요, 선행은 하고 계신가요? 작게라도 좋으니 한 번 해 보세요. 그 은혜가 신통해요.”
그가 권하고자 했던 ‘선행’ 역시 ‘자비’의 한 방편인 것이다.
■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자비로운 사람들”(마태 5,7)이다.
성경에서 ‘자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엘레오스’(eleos)고, 히브리어는 ‘케세드’(chesed)다. 여기서 ‘케세드’는 문맥에 따라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김 등의 단어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개신교에서는 이를 ‘긍휼’이라고 번역한다. 그리스어 ‘엘레오스’는 이처럼 풍요로운 의미를 지닌 ‘케세드’의 번역어일 뿐이다.
‘케세드’ 곧 ‘자비’에는 핵심적인 기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공감능력이고 또 하나는 충실이다. 우선 자비는 동정이나 측은지심 같은 ‘공감’능력을 말한다. 자비는 또한 ‘충실성’을 속성으로 지닌다. 이 두 가지가 연합하여 작동될 때 자비가 온전히 발휘되는 것이다.
먼저, 자비의 첫 번째 속성인 공감력에 초점을 맞춰보자. 구약에서 자비(‘케세드’)의 공감력은 ‘라함’(raham) 곧 ‘연민’으로 드러난다. ‘라함’은 본래 사람의 내장, 오장육부, 여성의 자궁 등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라함이 애간장 녹는 아픔 또는 단장의 슬픔을 머금은 ‘연민’을 가리키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호세아서는 하느님의 이 라함 곧 연민을 이렇게 실감나게 표현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얼마나 깊이 공감했으면 연민이 북받쳐 오르겠는가. 이는 한자어 ‘인’(仁)과 통하는 말이다. ‘인’의 속뜻은 한의학 용어 ‘불인’(不仁)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난다. ‘불인’은 마비된 상태 곧 기혈이 통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어질다’(仁)는 것은 상대의 아픔이나 속사정을 예민하게 공감하여 서로 감정이 통하는 것을 가리킨다. 상대방은 지금 배고픈데, 슬픈데, 고통스러운데 나는 전혀 느낌이 없다면 이는 ‘불인’ 곧 어질지 않음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속성인 이 연민 또는 인(仁)이 극도로 민감한 분이시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생과 고통을 하소연하며 마구 부르짖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알고 있노라(=느끼노라)”(탈출 3,7 참조).
‘보다’, ‘듣다’, ‘느끼다’ 전부 다 감각이지 않는가. 하느님의 이 감각이 작동될 때, 우리에게 구원의 열매가 나타난다.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의 자비로 구출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바로 이때, 자비의 두 번째 속성인 ‘충실성’이 발동된다. 하느님의 자비는 태초의 첫 강복과 구원의지를 끝내 관철시키는 자기충실이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다함이 없다”(애가 3,22 참조)라는 말이 나온다. 결국, ‘끝까지 간다’, ‘자비는 결코 변덕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자비를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비전으로 권고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표현은 명령어로 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초대다. 강제 의무가 아니라 간곡한 권유라는 말이다. 의무로 하는 일에 행복은 없다. 자비도 억지로 행하게 되면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결국 후회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것이 참 기쁨의 길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자비심은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유형의 실천으로 이행된다. 이 자비심이 ‘영적’으로 발휘되면 죄의 용서로 이어지고, 이 자비심이 ‘물질적’으로 발휘되면 자선이 되는 것이다.
■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가 그들이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셨다. ‘입는다’는 것은 수동태다. 성경에서 수동태는 거의 그 능동태의 주어가 하느님이다. 이는 곧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입는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 때, 하느님께서는 그 이상으로 갚아주신다! 이리하여 자비는 선한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강조하신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되받을 때는 우리가 아는 숫자처럼 100배, 60배, 30배로 받는다. 잘 되면 100배, 웬만해도 60배, 아무리 안 돼도 30배! 얼마나 은혜로운 주고받음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본인이 알아서 직접 베푸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교회를 통해서 베푸는 것은 더 좋은 길일 것이다. 교무금과 봉헌금을 내는 것은 ‘교회가 알아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하고 맡기는 셈이니까.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6월 22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