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5) 8가지 참 행복 - 먼저 무한 ‘자비’를 입었기에
자비, 주님이 먼저 베푸셨듯 그저 행하라
■ 오늘 일용할 ‘자선’
내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속해있던 신학원 원장 신부님은 굉장히 쾌활하고 늘 친절한 분이셨다. 하루는 어디 갈 일이 생겨 원장 신부님이 직접 모는 차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신부님은 차를 몰면서 기회가 날 때마다 다른 차에게 양보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원장이기 때문에 어디 달리 뚜렷하게 자선을 베풀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운전할 때라도 이렇게 자선을 행하자고 결심했지요. 이것이 내가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 자선입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에 어느덧 행복이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이는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가르침이 되었다. 자선은 ‘한꺼번에’ ‘크게’가 아니라 ‘야금야금’ ‘작게’ 실천하는 재미도 쏠쏠한 법! 방금 나는 ‘재미’라고 말했다. 그렇다 재미! 자선은 크건 작건 그 자체로 기쁨과 행복을 준다.
이러한 지혜를 반영하고 있는 단어가 자선을 가리키는 영어 ‘Alms’다.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지만 단수로 취급받는다. 왜일까? 본디 자선은 크게 ‘한 번’ 행하는 것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에서 일 것이다. 그러기에 자선의 실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몸에 배게 하여 선한 습관 곧 덕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 자비의 사표
자선은 자비의 여러 구현 방식 가운데 하나다. 성경에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0순위 사표는 단연 ‘토빗’이다. 토빗은 납탈리 지파에 속하는 유배민이었다. 그는 귀양 오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전만을 성소로 여기며 명절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던 사람이었다. 또 동족을 위하여 자선 사업을 많이 하였다.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 백성 가운데 누가 죽어서 니네베 성 밖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어 주었다”(토빗 1,17).
그러던 어느 날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만다. 뜰 안에서 잠을 자던 토빗의 눈에 뜨거운 참새 똥이 떨어져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토빗 2,9-10 참조). 그러자 그의 아내가 품앗이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하루는 아내가 웬 염소새끼 한 마리를 끌고 왔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집주인이 포상으로 준 것이었다. 하지만 토빗은 드디어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도둑질까지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리고 ‘돌려주라’는 토빗의 고집스러운 잔소리에 견디다 못한 부인은 그를 향해 억하심정을 폭발해 버린다.
“당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지 알아요.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리고 뭐, 자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항상 퍼주기만 하더니, 참새 똥을 맞아 눈이나 멀고, 뭐예요! 나도 이제 이놈의 노동, 지쳤다구요…”(토빗 2,14 참조).
아내의 이 말에 그는 즉시 절망에 빠진다. 4년이 넘는 힘든 고생과 주변의 조롱까지는 잘 참아냈지만, 아내의 이 한마디를 그는 감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한마디는 이토록 위력이 있는가? 절망한 토빗은 죽음을 자청하는 탄식의 기도를 올린다.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토빗 3,6).
이 기도는 거꾸로 응답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죽음 대신에 라파엘 천사를 보내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 늙은 토빗은 천사가 전한 영약을 바르고 눈을 뜬다. 라파엘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며 이렇게 말한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8-9).
이것이 행복의 원리다. 물론, 신약에로 넘어와서 죽음과 죄의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로 청산되었기에,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토빗서의 관점이 극복되었다. 하지만 자선을 통해 누리게 되는 축복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 자비의 교과서
「내심낙원」의 저자 우징숑(오경웅)은 성경에서 자비의 교과서로 루카 6,36-38을 꼽는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6-38).
하나하나 깊이 새겨보자.
첫째로,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이 결국 자비의 실행이다. 앞에서 자비를 연민, 측은지심, 인이라고 했다. 이것을 품으면 함부로 심판하지 않는다. 역지사지로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는데, 어찌 무자비한 심판이 가능하겠는가.
둘째로, 용서하는 것이 자비의 실행이다. 용서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단어가 영어 ‘forgive’다. 여기서 for는 ‘위하여’를 give는 ‘주다’를 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그러니까 용서란 “누군가를 ‘위하여’ 거저 ‘주는’ 것”, 곧 베푸는 것이다. 곧, 설령 상대방이 틀렸고 나는 피해자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까짓 거 주어버리는 것이 용서다.
셋째로, 자비는 문자 그대로 주는 것을 가리킨다. 나눔 자체가 자비의 실행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무슨 사족이 필요하랴.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그 원리에 대하여 성 토마스 모어가 증언한다. 그는 순교 직전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판관님, 오늘만은 제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게 해 주십시오. 친구여,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오로와 스테파노의 관계처럼 되기를 원하오. 바오로는 스테파노를 미워하여 돌로 쳐 죽인 사람이지요. 그러나 바오로는 후에 예수님을 믿고 평생 복음 증거자의 인생을 살았으며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스테파노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손잡고 영원히 살고 있소. 비록 당신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당신도 예수님 믿고 후에 저 하늘나라에서 나와 함께 손잡고 영원토록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재판관은 물었다.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나에게 당신은 어찌해서 이렇게 선한 말을 하는 것이오?”
토마스 모어는 이렇게 답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오.”
이것은 진실이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먼저 무한 ‘자비’를 입었기에 우리 자신도 한껏 자비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6월 29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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