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56) 십계명 : 일곱째 계명 ‘도둑질하지 마라’ (하)
인간적 삶 영위할 수 있는 보수 지급해야
지난 호에 이어 ‘도둑질을 하지 마라’는 일곱째 계명에 대해 계속 살펴봅니다. 이 일곱째 계명은 경제 활동과 사회 정의, 국가 간 정의와 연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도 관련됩니다.(2419~2463항)
교회의 사회교리(2419~2425항)
교회가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기본권과 영혼 구원이 관련될 때, 교회는 사회나 경제 문제에 개입해 목소리를 냅니다. 교회는 인간의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 생활에 대한 교회의 이런 가르침을 사회교리라고 합니다.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 사회 문제에 있어서 “성찰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판단의 기준들을 이끌어 내며, 행동의 지침들을 일러”(2423항) 줍니다.
경제 활동과 사회정의(2426~2436항)
경제 활동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부응하려면, 사회 정의에 비추어서 도덕적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노동은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노동의 수고를 견뎌냄으로써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협력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냅니다. 노동은 따라서 성화(聖化)의 수단이자 그리스도의 정신을 불어넣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인류 공동체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제 생활에는 대립되는 이해 관계로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은 회사 대표, 노동자 대표,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공권력과 같은 사회 각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는 협상을 통해 완화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경제 활동, 특히 시장 경제 활동은 제도적 법률적 정치적 규범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보장을 전제로 합니다. 국가는 이 두 가지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보장해줘야 합니다.
기업 책임자들은 사회에 대해 자신들의 활동과 관련한 경제적 생태학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즉 경제적 흐름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취업과 직업은 성별과 신분 곧 원주민과 이주민을 가리지 않고 차별없이 허용돼야 합니다. 사회는 상황에 그 사회의 시민들이 일자리와 직업을 얻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적정 임금은 노동의 정당한 결실입니다.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은 물론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사회적·문화적·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돼야 합니다.”(2434항) 따라서 사업자와 직원이 합의해서 정했다고 해서 그 임금이 도덕적으로 다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파업이 도덕적으로 정당할 때가 있습니다. 적정한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고 필수적일 때는 파업이 도덕적으로 정당합니다. 그러나 폭력을 동반하거나 근로 조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목적 또는 공동선에 어긋나는 목적을 내걸었다면 그 파업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국가들 사이의 정의와 연대 의식 (2437~2442항)
부당하고 폭리를 추구하는 재정적 제도, 국가들 사이의 불공정한 교역 관계, 군비 경쟁은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들은 도덕적·문화적·경제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유한 나라들은 발전 수단을 스스로 확보할 수 없거나 확보에 방해를 받는 가난한 나라들에 대해 연대성을 보이고 사랑의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직접적 원조는 때로는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개발 국가들의 발전을 막는 경제적 또는 재정적인 국제기구들을 개혁해서 성장과 해방을 위해 애쓰는 가난한 나라들을 뒷받침해야 합니다.
정치 구조나 사회생활의 조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교회 사목자들의 할 일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열정으로 현세 일들을 활성화하고 정의와 평화의 일꾼으로 행동하는 것은 평신도의 의무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2443~2449항)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교회의 변함없는 전통입니다. 이 사랑은 참 행복의 복음, 예수님의 가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배려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 사랑은 물질적 가난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다양한 형태의 가난에도 미칩니다.
자선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궁핍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자선은 물질적 선행만 뜻하지 않습니다. 가르치고 충고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행위 또한 영적 자선입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은 형제애의 중요한 증거이며,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6일, 정리=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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