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77) 8가지 참 행복 - 뵘의 축복과 못 뵘의 축복
‘하느님 뵈옴’은 ‘기도’에서 발생하는 은총!
■ 나도 기도할 때 졸아요
연구라는 1차적 본령에 더하여 저술과 강연을 소명으로 여기고 있는 나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군만마다. 왜? 10여 년 이상, 새 시대를 위한 교회 대안으로 신바람 신앙과 기쁨의 영성을 강조해 오면서 그 논거를 장황하게 제시해야 했었는데, 이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로 족할 형국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덕에 설명은 짧아지고 감동은 짙어지기 일쑤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기도라는 주제를 다룰 때다. 교황 자신이 바치는 기도와 그에 대한 고백은 우리 신자들에게 친절한 영적 안내자가 되어준다. 교황의 육성 한 토막을 들어보자.
“내 생각으로, 기도란 하느님 앞에 굴복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경험입니다.…내가 가장 큰 신앙적인 체험을 하게 될 때는 바로 성체조배실에서 기약 없이 앉아 있을 때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리에 앉아 잠이 들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온전히 맡겨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내 손을 잡아주시는 것과 같은 느낌말입니다.”(졸저, 「교황의 10가지」참조)
“기도란 하느님 앞에 굴복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경험이다”라는 교황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기도 좀 해본 사람이다. 스스로 내 뜻을 이루려고 하고 내 계획을 관철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주님의 뜻과 지혜가 옳다. 주님께서 기도 응답을 안 주셨을 때는 안 들어주신 게 옳고, 늦게 주셨을 때는 늦게 주신 게 옳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다. “맘대로 하세요” 하고 자신을 낮춰, “저는 가라는 대로 가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복종을 고백하는 것이 상책이다.
교황은 또 기도의 차원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날 바라보도록 가만히 있는 겁니다!” 이는 수동적인 관상으로 들어가는 선행조건이다. 능동적인 관상은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합치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수동적인 관상은 나는 가만히 있고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시게 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면 하느님의 은혜가 나에게 삼투된다. 교황은 바로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요놈은 어디에 써먹을까, 어떻게 고쳐서 쓸까?” 이처럼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셔야 하느님의 계획이 세워진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여섯 번째 행복,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누리는 ‘하느님을 뵈옴’은 크게 볼 때 방금의 화제인 ‘기도’의 범주에서 발생하는 은총이다.
■ 하느님을 본 사람들
성경에는 ‘영으로 깨끗’하여 하느님을 뵙는 특은을 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잘 나온다. 구약에서 그 본보기는 ‘이사야’ 예언자다. 그는 홀연 천상궁중회의에 불러올림 받는 영광을 누린다. 하지만 그는 영광중에 주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 고백이 영으로 깨끗한 사람의 진실이다. 사람이 아무리 영으로 깨끗하다 하더라도 절대 순수 앞에 서면 스스로의 영혼이 탁해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부정한 입술을 본다. 정말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추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사야가 자기를 회개하고 고백하였더니 정화의 은혜가 임하였다. 불에 달군 숯으로 깨끗하여진 것이다(이사 6,6-7 참조).
이리하여 이사야는 영으로 깨끗한 상태를 넘어 투명하여 졌다. 비로소 그는 사명을 수행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윽고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응답한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여기에 바로 심오한 뜻이 있다. ‘영으로 깨끗함’은 하느님을 만나는 은혜를 가져다주고,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소명자가 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영으로 깨끗한’ 사람의 대표는 ‘마리아 막달레나’다. 그녀는 일곱 마귀에 들렸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마귀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치유되어 온전히 깨끗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뒤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이는 그녀가 이미 재물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적 ‘깨끗함’의 상태에 있었음을 뜻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자리까지 그분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 서서 지켜보았다. 이는 그녀가 제자들과는 달리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적 ‘깨끗함’의 경지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후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시신에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 다른 마리아와 함께 무덤으로 갔다. 이미 예수님께 잘 보여 봤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그녀가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만 움직이는 ‘깨끗함’의 덕을 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러한 ‘깨끗함’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 합당한 보상으로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주셨다. 말 그대로 ‘하느님을 뵙는’ 영광을 누렸다.
■ 못 뵘의 축복
성경 속 인물들의 환시나 주님 목격담은 특수체험이지 대중신심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세심한 식별을 요한다.
신자들 가운데 유독 하느님으로부터의 환시를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귀로 듣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나 하느님 뵈었어. 나타났어, 내 꿈에!”
사실 전혀 개연성이 없는 일도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말한다.
“나 예수님 음성 들었어!”
계시의 말씀은 이렇듯 소리로도 들린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사실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방식’에서 낮은 수준에 해당한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감을 상징적으로 활용하는 소통은, 마귀들이 정탐하고 도청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마귀들의 조작에 의해 잘못된 환시를 볼 수도 있고, 잘못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는 데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 이냐시오 성인 등 영성의 대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바다.
그런데 정탐이나 도청이 안 되는 방식으로 주님이 소통하실 때가 있다. 이때는 생각과 생각이 그냥 통째로 옮겨 간다. 하느님의 생각이, 그분의 지혜가 내 안으로 통째 옮겨 들어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어도, 매개도 없다.
그러므로 “왜 제게는 안 나타나십니까! 답답합니다!”라든가 “왜 말씀을 안 주십니까! 듣고 싶습니다!”라며 푸념하지 말 일이다. 그리하면 어느 날, 순간적으로 언어를 초월한 생각이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7월 13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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