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89)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6) - 바벨탑 후(後)_아브라함 2
갚아 주마, 얹어 주마, 100배 늘려 주마!
■ 바벨탑의 논리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 이는 한시대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화근이었던 인간의 야욕과 교만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신적 경지에 이르러 ‘신 없는 세상에서’ 신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모든 저의! 그로부터 오늘의 바벨탑들은 곳곳에서 축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바벨탑의 논리는 우리를 매혹한다.
“자, (우리가)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우리)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여기서 주어는 ‘우리’다. ‘우리’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서, 즉 무엇인가를 ‘하여’, 마침내 ‘(우리) 이름을 날리자!’ 바로 이런 의도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호기로운 꿈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있다. 곧, “우리 인간이 신적인 경지를 구축하자”는 식의 도발적 도전이었던 점이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엄연한 피조물로서 자기 분수를 몰랐던 저 교만은 결국 창조주 하느님의 진노를 사 붕괴, 흩어짐, 그리고 소통 장애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바벨탑의 교훈은 우리 일상의 삶에도 적용된다. 삶의 주도권을 ‘우리’, ‘나’가 가지려 할 때 그것은 이미 바벨탑의 시작이다.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 자체가 이미 신의 영역을 넘보는 공명심이다.
시방도 도처에서 수상쩍은 음모의 소리들이 와글와글 댄다.
우리가 해내자, 그것은 내가 한다, 무엇인들 못할쏘냐. 초-, 울트라-, 나노-, 유전자복제…, 첨단 성과로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초인, 초능력, 헤게모니, 패권…, 무소불위의 권세를 부리자.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신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신이 되자. 덩더쿵, 덩더쿵, 우리끼리 신들의 향연을 즐기자.
■ 역바벨탑 부르심
아브라함의 등장은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에 이어 극적으로 이뤄진다. 그 사이의 족보는 연결고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바벨탑으로 인해 초래된 총체적 비극을 치유하려는 하느님의 해결책, 곧 대안이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역바벨탑 부르심’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놀랍게도 부르시는 대목을 보면 궤가 딱 맞아 떨어진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뜬금없이 날벼락처럼 떨어진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어 하느님의 계획이 선언된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2).
바로 이 문장에 역동적인 반전이 내장되어 있다. 앞의 ‘바벨탑 논리’를 치유하는 ‘역바벨탑 논리’가 힘차게 파동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가. 여기서 ‘나’는 ‘하느님’이시다. 바벨탑 음모의 주인공 ‘우리’(인간)가 ‘나’(하느님)로 전환되었다. 내용적으로도 ‘(우리가) 탑을 세워, (우리) 이름을 날리자’던 바벨탑의 야욕은 ‘나(하느님)는 너(아브라함)를 큰 민족이 되게 하여,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하느님 계획으로 궤를 맞춰 바뀌었다. 보이는가, 이 극명한 대조가! 한마디로, 역사의 주도권이 인간에게서 하느님에게로 넘어가는 대전환이 이 약속 말씀에서 뚜렷하게 읽히는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서 남용을 할 때는 바벨탑이나 쌓고 대재앙으로 끝났었지만, 다시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발휘하시니 이제 새축복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쯤에 이르니, 인류 죄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충실하고 집요한 하느님의 자비가 거듭 확인된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의 값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할 때 그들에게 입혀준 ‘가죽옷’, 아벨을 죽인 카인이 떠돌이 신세가 될 때 이마에 새겨준 ‘보호의 징표’, 노아시대 하늘에까지 악취를 풍긴 타락에 홍수의 징계가 내려질 때 화해의 가교로 띄어주신 ‘무지개’에 이어, 바벨탑 역모에 내려진 민족들의 풍비박산을 치유하실 비책으로 ‘성조 아브라함’이라는 묘수를 강구하심! 이야말로 신적 지혜가 깃든 자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느닷없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했을까? 한마디로 그는 순명과 온유로 하느님의 분부를 이행했다. 자신의 의지를 접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다. 생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양도했다. 그랬더니, 듣도 보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잇따라 일어났다. 이 이치가 장황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성경 속 아브라함 이야기에 깔려 있는 복선이다.
■ 바벨탑과 제단
어리석은 사람들은 작당하여 바벨탑을 쌓았다. 아브라함은 오롯한 마음으로 제단을 쌓았다. 야훼 하느님의 분부와 약속이 떨어지면 그는 바로 그 자리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바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8).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세 13,18).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창세 22,9).
제단은 인간 중심의 삶을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하는 영적 전향의 발로다. 이 중심의 이동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른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의 능력이나 지혜나 자비를 믿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 지혜, 자비에 내 삶을 의탁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것은 믿음의 행동이었던 셈. 아브라함은 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창세 15,6 참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단 쌓기의 비밀을 이렇게 발설한다.
몸소 내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이 어인 영광. 홀연 ‘동서남북 끝없는 땅’을 약속해 주시니, 이 무슨 성은. 그만 감읍하여 무어라도 바치고 싶었지.
제단을 쌓았더니 쩌르렁하고 하늘이 열렸지. 제물도 바치기 전에 둥그레 발그레 신령한 미소(민수 6,25 참조)가 번쩍번쩍 천상에서 명멸했지. 내 마음 한 조각 떼어 가장 실한 놈 맏배 굳기름으로 바쳤더니, 향기가 연기처럼 피어올랐지. 애틋한 내 사랑 투명 나비처럼 춤을 추며 아스라이 하늘치마에 이르니, 그 흐뭇함에 성삼의 후각 벌름벌름 취하신 듯 했지.
우러르는 시선 너머로 천사들의 노랫가락 들릴 듯 말듯 하늘 산에 메아리쳤지.
네 첫 것을 다고, 네 첫 마음을 다고, 네 몽땅을 다고, 네 오롯함을 다고. 네 새벽을 다고, 네 흉금을 다고, 네 열쇠꾸러미를 다고, 네 충심을 다고. 갚아 주마, 얹어 주마, 튀겨 주마, 30배 60배 100배로 늘려서 주마.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10월 26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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