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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9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13 - 비탄의 인간, 욥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15 조회수2,029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9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13) - 비탄의 인간, 욥

왜 절망하느냐? 깨달으라, 힘내라, 견뎌라!



■ 비극과 통회의 지평

본디 욥은 하느님 마음에 쏙 드는 의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시련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밀려온다. 상지(上智)의 하느님께서 욥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그를 궤멸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을 용인하신 것이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욥 1,12).

이렇게 해서 의인으로 소문났던 욥은 비참한 연쇄적 몰락에로 곤두박질한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위로차 그를 찾아오지만, 참혹한 몰골 앞에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한다. 차라리 침묵으로 지켜만 볼 뿐(욥 2,13 참조).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를 도울 양으로 한 마디씩 훈수한다.

“생각해 보게나,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 환난이 흙에서 나올 리 없고 재앙이 땅에서 솟을 리 없다네”(욥 4,7 5,6).

이는 친구 엘리파즈의 첫 번째 조언이었지만, 다른 친구 빌닷과 초파르 역시 이와 다르지 않는 논리를 편다. 우리네 쓰는 말로 ‘자업자득’, ‘업보’라는 논리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죄를 이실직고하며 통회하고 행실을 바로잡으라는 권고였던 셈이다.

이에 대해 욥은 수미일관하게 자신의 결백 곧 의로움을 주장한다.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으니… 내가 입을 다물겠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깨우쳐 보게나”(욥 6,10.24).

욥의 고집스런 항변에, 친구들은 돌아가며 마치 심문하듯이 가능한 죄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숨은 허물과 죄를 시인하기를 종용한다. 하다못해 자식들과 조상들의 죗값까지 나열된다. 하지만 욥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선 요지부동의 확신이 있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공방전은 서로의 의분을 자극하면서 점입가경이 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면 결국 똑같은 논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상선벌악의 고정관념이다. 성찰을 돕는답시고 온갖 지혜를 동원한 친구들의 공세도 한결같이 상선벌악의 논조였고, 이에 대한 욥의 변론 역시 “이런 참혹한 비극을 당할 만큼 죄받을 짓 한적 없다”는 변론이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이르러 터진 깨달음은 그 틀을 깨는 것이었다. 고통의 의미에 관한한, 친구들의 면박에도 욥의 항변에도 답이 없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뜻은 대체로 인간이 생각하는 절대기준 ‘상선벌악’에서 찾아지지만, 그 너머의 의미도 있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인 것이다. 이는 욥에게 내린 하느님의 질책을 통해서 암시되고 있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네가 그렇게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 38,2.4).

이윽고 욥은 “죄없는 자에게 왜 이 고통이?”라며 상선벌악의 논리로 따져 물었던 자신의 항소에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음을 깨닫고 시인한다.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이 고백은 그로부터 수천 년이 족히 흐른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더욱 절실하다. 이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겪는 부당한 고통에 대해 하늘을 원망하고 의분을 품고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를 일이니.


■ 고통의 의미

욥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흥분을 수습하며 고백한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5-6).

욥이 참회한 것은 악행이 아니라, 말의 짧음 곧 생각의 얕음이었다. 고통의 의미는 결국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는 두루 헤아릴 수 없다는 것! 상식의 성찰을 무시할 수 없으되, 그 너머의 의미에 생각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 하느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이 높다는 것! 대단원에 이르러, 욥의 이 뉘우침에 하느님의 더 큰 축복이 임한다.

욥의 깨달음은 어디까지 미쳤을까? 하나는 확실하다. 욥은 뼈저린 고통을 겪고 나서야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았다. ‘뵈었다’는 말은 이 체험을 가리킨다. 입때껏 욥은 풍문으로만 들어 하느님을 객관적인 ‘그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하느님’ 곧 욥의 하느님이시다.

욥의 깨달음! 그 연장선상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깨달은 고통의 의미는 다음의 세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 견책의 의미다. 이는 신앙인이 잘못이나 죄에 빠졌을 경우 그것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이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 12,6)고 했다. “그들은 환난 속에서 나를 찾으리라”(호세 5,15) 하신 말씀처럼, 이런 고통은 궁극적으로 다시 하느님을 찾게 해 준다.

둘째, 시련의 의미다.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신명 8,2) 하신 말씀처럼, 고통은 시험을 위해서도 주어진다. 이런 고통은 결과적으로 믿음의 성장을 가져다준다.

셋째, 구원을 위한 대속(代贖)의 의미다(이사 53,5-6 참조). 대속적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1베드 2,24). 이런 고통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

세 가지를 열거했지만, 이 역시 전부가 아니다. 여전히 미지의 의미지대가 있다. 그 지대를 향하여 우리는 이 시대의 욥이 되어 고통의 골짜기에서 밤마다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른다.

왜? 왜? 왜?
숱한 밤을 꼬박 새우며, 소리조차 나지 않는 탄식으로 물었습니다.
목불인견! 왜 이토록 끔찍한 토네이도급 연속참사가 죄 없는 내게?
속수무책! 왜 이 감당할 수 없는 천형(天刑)의 수모가 무죄한 내게?
단말마! 왜 구더기 고름 파먹는 이 고통의 극치가 하필 내게?

왜? 왜? 왜?
침묵 속에서 흑야를 헤치고 소리 없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왜 너는 너에게서 비롯한 부조리의 까닭을 내게 묻느냐?
왜 너는 종재기만한 이해의 그릇으로 하늘스런 뜻을 담으려느냐?
왜 너는 절망하느냐? 깨달으라, 힘내라, 견뎌라!
네가 모르는 뜻이 영글어 네 앞에 보람으로 나타날 때까지.

내밀한 속삭임이 하도 반가워 속뜻도 모르는 채,
주룩주룩 환희의 눈물만 흘렀습니다.
그분을 뵙다니, 지엄하신 그분 자비의 현존을 내 눈으로 접하다니.
터트려 주시다니, 내 답답한 다람쥐쳇바퀴 생각의 궁굴림을 트여주시다니.
포옹해 주시다니, 내 실존 모든 것에 새살 돋게 할 그 영험한 터치로 나를 어루만져 주시다니.
돌연 제 입술은 중얼거릴 뿐.
그랬구나, 그런 것이로구나, 그럴 것이로구나.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12월 14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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