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0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23) - 비운의 판관 기드온
훌륭히 싸워 의로움의 화관 쓸 하느님의 용사
■ 5단계 공식
지혜란 우리가 늘 봐 오던 현상에서 어떤 법칙(성)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안목이다. 그러기에 지혜를 얻으면 현실문제의 원인과 답을 보는 혜안이 열린다. 국가적으로 난국에 처했을 때 정치지도자가 현자를 귀하게 모시고 고견을 청해 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이런 의미에서 판관기는 ‘지혜’의 책이다. 판관기는 우리에게 역사에서 거듭되는 ‘5단계 공식’을 전한다. 일종의 반복된 패턴! 이것이 역사의 흐름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1단계로, ‘하느님을 모르는 세대’가 ‘우상’ 숭배에 빠진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2단계로, 그 죄의 결과로서 외침(外侵)을 받는 쓴맛을 본다. 보호하고 지켜주시던 하느님이 등을 돌리니 외적의 침입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3단계로, 압제에 시달리다 못해 백성들이 못 살겠다고 탄원을 한다. 혹독한 고난 끝에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우리가 이제 바르게 살겠습니다” 하며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4단계로, 하느님께서 판관을 세우신다. ‘판관’은 영어로 Judge 곧 재판관이다. 이를테면 역사의 재판관, 정의의 사도라는 뜻이다. 판관들을 세우실 때 특별히 임명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야훼의 영이 내렸다”(판관 3,10 6,34 참조)고 되어있다. 원어로 ‘내렸다’라는 표현에는 ‘덮쳤다’는 뜻이 강하다. 카리스마로 덮쳐 휘어잡았다는 뜻이다. 판관에게 최고의 무기는 카리스마다.
5단계로, 판관이 이끄는 급조된 병력이 승리해서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판관이 죽고 나면 다시 똑같은 드라마가 반복된다는 점이다.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판관 2,19).
이리하여 위의 5단계 공식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가만히 짚어보면 5단계 공식은 오늘날 우리들 신앙인생에서도 비슷하게 재연된다. 조금씩 변형된 모양새지만, 실질적 냉담(1)→우환(2)→회개와 탄원(3)→도우심(4)→은총의 세월(5)이라는 드라마가 극적으로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 기드온 가(家)의 흥망
판관기 기술에서 비교적 비중 있는 분량이 배정된 판관들로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타, 삼손 등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 가운데 영성적으로 특별한 영감을 주는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기드온을 꼽겠다.
기드온 이야기의 발단은 역시나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판관 6,1).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미디안족의 손에 붙여져 7년간 혹독한 압제에 시달려야 했다(판관 6,2-6). 온갖 횡포를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자, 하느님께서는 므나쎄 지파에 속하는 농부의 아들 기드온을 부르신다. 그는 그다지 준비된 사람은 아니었다. 기드온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판관 6,15).
하지만 야훼 하느님께서는 그를 안심시켜 주시며, 가장 먼저 산성 위 바알 제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야훼의 제단을 구축하도록 명하신다. 기드온은 부하 열 명을 데리고 하룻밤 사이에 이 도발적(?)인 미션을 수행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심을 동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누가 ‘참 하느님’이신가를 진지하게 묻게 한다.
이 일로 백성들의 주목을 받고 있던 기드온에게 야훼의 영이 내려 그를 독려한다. 그래서 여러 지파의 사람들을 모았더니 32,000명 정도가 된다. 하지만 기드온은 아직 자신이 없다.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이에 기드온은 하느님께 징표를 요구한다. 그는 양털을 땅에다 깔아놓고 이렇게 기도한다. “양털만 촉촉하게 적셔지면 제가 하느님이 임한 줄을 알겠습니다”(판관 6,37 참조).
그러자 그대로 되었다. 하지만 기드온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번 청한다. “양털만 마르고 다른 땅을 적셔주시면 믿겠습니다”(판관 6,39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것도 그대로 해 주셨다. 이에 용기를 얻은 기드온은 전쟁터로 나가는데, 야훼의 말씀이 희한하다.
“병력 숫자를 줄여라, 너무 많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를 아는 체도 않고 제 힘으로 승전했다고 으스댈 위험이 있다. 자신 없는 사람은 집으로 다 가라 그래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판관 7,2-3 참조).
그랬더니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았다. 이 가운데서 또 추리신다.
“이 중에서 내가 고르겠다.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하여라”(판관 7,4 참조).
그래서 기드온은 군사들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한다. 여기서 야훼의 말씀이 참 희한하다. “개가 핥듯이 물을 핥는 자를 모두 따로 세워라.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도 모두 따로 세워라”(판관 7,5).
‘개처럼 핥아서’ 마시는 사람? 왜 하필 이런 사람? 곰곰 묵상에 잠겨드니, 영감어린 지혜의 음성이 뇌리를 스친다.
이 사람이다. 물가에서 ‘무릎을 꿇은 채’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다. 자애심에 허투루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 주저앉아 몸이 굼뜨지 않은 사람. 용기가 궁하여 마음으로 뜸들이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이다. 물가에서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서 마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다. 매 순간 선비의 곧음으로 자존감을 지키는 사람. 공분으로 정신이 기민한 사람. 명령에 쫑긋하며 즉시 움직일 태세를 갖춘 사람.
이 사람이 32,000의 경쟁자 중 300명 안에 뽑힐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바로 “훌륭히 싸워, 의로움의 화관”(2티모 4,7-8 참조)을 쓰게 될 하느님의 용사다.
어쨌든, 분부대로 행했더니 남은 숫자는 300명이었다. 결국 기드온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전쟁에서 이긴다. 백성들은 전공을 세운 그에게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지만 사양한다. 이후 기드온의 시대 마흔 해 동안 이 땅은 평온하였다.
하지만 그의 후손 70명은 단 1세대도 넘기지 못하고, 권력욕에 불타던, 소실의 아들 아비멜렉에 의해 집단 살해되는 참극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훗날 아비멜렉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지만, 결국 이 역시 기드온 가(家)의 끔찍한 말로를 확증하는 것일 뿐이었다.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판관기는 이것이 기드온의 경솔한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한다. 곧 기드온이 미디안족을 물리친 직후 전리품 장신구들을 모아 대사제의 제복 ‘에폿’을 만들어 이를 우상화한 죄가 화근으로 작용했던 것이다(판관 8,27참조).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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