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비자교리시간을 통하여 할 일들
2015-0612. 금요일. 이태원성당
1. 여러분이 신앙에 대해서 배우느라고 봉헌(!!)한 이 시간을 이용하여,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우리 교회공동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봉헌(奉獻,--그게 돈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삶에 더 중요한 것이 될 시간(時間)--!!)한 것을 이용하여, 제가 믿고 따르는 신앙공동체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이 시간의 본래 목적입니다.
2. 이 시간에 참으로 조심할 것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할 것이 아니라, 이 시간에 신앙에 대해서 말하는 제가 조심해야 할 것을 말하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가진 두 손이 부딪혀 소리가 나려면, 두 손이 같거나 비슷한 대등한 위치에 같거나 비슷한 힘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제가 신앙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에 덧붙여서, 제 말을 통해서 신앙에 대한 것을 알아들을 여러분이 조심해야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장은 제가 하는 말이 여러분의 귀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준비하고, 다음 기회가 되었을 때 또 합당한 표현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잘 알아들으려고 하고, 또 기록하는 자세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한번만 들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3.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가 몸은 여기에 와 있지만, 나에게는 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라고 말하든가, ‘내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여기에 와 있지만, 나는 신앙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인데!’이라든가, ‘나에게 신앙에 대해서 말해주는 내용을 봐서 내가 그 소리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하지...!’하는 자세로 여러분이 이 시간에 함께 한다면, 그런 사람의 삶에 좋은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삶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두 손이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제가 준비하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먼저이겠지만, 여러분도 같은 시간에 보통의 자세는 넘는 좀 더 정성이 있는 준비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제가 갖는 바람일 수도 있지만, 이 시간이 그저 인간의 행위만으로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필요한 자세는 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 자세를 갖추었는지 아닌지는 내가 가장 잘 알겠지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4. 여러분에게 일방적으로 제가 말하는 이 시간을 가리켜서 ‘예비자교리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인 그리스도교신앙에 관해서 알아들으려고 하거나 그 내용을 만나기 위해서 여러분이 이 장소에 여러분이 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진행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부정적인 자세표현의 모양을 말씀드린 3가지는 실제로 이 시간에 일치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권장할만한 것도 아니며, 그게 좋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닌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런 자세는 일찌감치 내 마음과 생각과 삶의 태도에서 쫓아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가 갖는 바람입니다.
5.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제 흥에 겨워 역사연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방향으로 얘기가 흘렀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어야 할 내용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오늘 시간으로 미뤘습니다.> 지난 시간에 했어야 할 이야기라고 말한 내용에 이어서, 이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자세를 말씀드리면 더 좋을 듯합니다. 신앙교리시간, 예비자교리시간이라고 하는 이 시간에 권장할 목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교리시간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신 것뿐이지만, 이 시간을 진행하는 제 입장에서는 말씀드릴 기본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리(敎理,=종교상의 이치나 원리)라는 말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사항입니다.
6. 예비자교리시간에 여러분에게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삶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것’에 대한 이야기시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의 삶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이 세상의 삶을 해석하자는 것이며, 또 다른 말로는 지금까지 유지해온 삶의 자세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조심해야 할 것이 생깁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유지하고 살아온 삶의 자세가 무조건 잘못 되었다거나, 전부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시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흑백논리(黑白論理)에 빠져 살기 쉬운 우리 사람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우리의 생각이 바뀌거나 선택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는 해도, 신앙에서는 그렇게 하면 오류가 생기고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커집니다. 세상의 일을 대하는 방식과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원칙(原則)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어떤 방법을 동원하면 그 일이 가능한지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환경과 조건은 수시로 바뀌고 달라지는 법이고, 그것을 대하는 내 자세와 각오도 변화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7. 현실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사는 드러내는 내 현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 삶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하느님의 기준’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세상에 당신의 뜻을 펴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완벽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소리를 직접 들은 사람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도 문제이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지도 문제입니다. 어쨌든 이런 여러 가지 자세를 뒤로하고, 그래도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만날 방법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아주 요기한 것이 ‘성경(聖經)’입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인 책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하고 의심하자면 한도 없고 끝도 없으니, 그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 인간의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성경의 말씀을 기준으로 보겠습니다.
8. 지금부터 2500년 전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쯤에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됐다고 알려져 있는 이사야예언서의 한 부분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의 소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의 번역본은 2005년에 우리나라 말로 새로 번역된 것인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사야예언서55장)이 있습니다. “6 만나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9. 이전(1971년경에 처음 번역된) 성경에는 이 부분의 표현이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필요할 수도 있으니, 그 내용도 들려드리도록 하지요. 같은 부분입니다. 차이점만 보면 될 듯합니다. “6 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7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9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번역본이 다르니까, 글자는 차이가 날 수 있어도 뜻에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두 가지 내용을 여러분에 들려드렸습니다.
10. 사람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나 뜻을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담긴 말씀을 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이 옳다고 전제한다면, 사람의 생각이나 뜻은 시간과 상황, 사람과 국가, 내가 만나는 사람이나 그 대상에 따라서 똑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니, 하느님의 뜻이나 생각보다 그 정도를 낮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뜻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역시도 누군가가 여러분보다 먼저 들은 사람이 있다거나,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러한 정신을 담아, 인간의 뜻보다 한 차원이나 두 차원은 높을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맞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 이 예비자교리시간이고, 이 시간의 진행방법입니다.
11. 이러한 뜻을 담아, 제가 우리 신앙에 대한 얘기를 하는 시간인, 이 예비자교리시간은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우리들 삶을 해석할 기준이 되는 신앙(信仰)’에 대한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말의 뜻을 우리말 사전은 ‘<종교용어>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게 될 내용에는 이 신앙에 대한 내용 외에 다른 것을 말하는 경우는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을 삶의 모습으로 드러내는 일인 계명의 실천에 대한 것과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하느님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은 은총과 그 은총을 청하는 기도에 대한 내용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12. 신앙의 중심(中心)과 핵심적인 대상인 ‘신/하느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제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러한 하느님은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인이 아니면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해도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일로 본인의 삶에만 영향을 남기면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태도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때는 어떻게 될까요?
13. 이런 것을 표현하는 얘기를 하나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의 의도로 만든 이야기일 테니, 여러분이 그것은 감안(勘案,=참고하여 생각함)하고 들어야 할 일입니다. 물리학에 뛰어난 인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4. <신의 존재증명---아인슈타인>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가?" 그러자 한 학생이 용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교수가 다시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가?"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수님."
교수가 다시 말했다. "만약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악(惡, =evil)도 존재하므로 하느님은 악도 창조하셨네. 그리고 우리의 성과(work)가 우리가 누군지를 규정짓는다는 원리에 근거한다면, 하느님은 악(惡)이다." 그러자 학생은 이 말에 조용해졌다. 그 교수는 스스로에게 대단히 만족해하며 학생들에게 하느님을 믿는 신앙은 미신(迷信,=종교적/과학적으로 망령되다고 생각한 믿음)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면서 으쓱해했다.
그때 다른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교수님,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하고 교수가 말했다. 학생이 일어서서 물었다. "교수님, 추위가 존재합니까?" "무슨 질문이 그런가? 당연히 추위가 존재하지. 자넨 추운 적이 없는가?" 교수가 말했다. 학생들은 젊은이의 질문에 킬킬거렸다. 젊은이가 말했다. "사실은, 교수님, 추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학 법칙에 의하면, 우리가 추위라고 간주하는 것은 실상은 '열의 부재'입니다. 누구나, 그리고 무엇이든 에너지를 전달할 때 연구가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0도(=섭씨-273도)는 '열의 완전한 부재(不在)'입니다. 그 온도에서는 모든 것이 반응 할 수 없거나 쓸모없어 집니다. 추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열이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창조한 것입니다."
학생은 계속했다. "교수님, 어두움이 존재합니까?" 교수가 대답했다. "물론 존재하지." 학생이 대답했다. "다시 한 번 교수님이 틀렸습니다. 어두움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사실상, '빛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빛을 연구 할 수 있지만 어두움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뉴튼의 프리즘을 이용하여 흰 불빛을 여러 가지 색으로 나누고 각 빛깔의 다양한 파장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간단한 한줄기 빛으로도 어두움을 깨고 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어떤 장소가 얼마나 어두운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빛의 양을 측정합니다. 이것이 옳지 않습니까? 어두움은 '빛의 부재'를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마침내 젊은이는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악(惡)이 존재합니까?" 이제 교수는 확신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물론이지. 이미 말한 대로야. 우리는 매일 보지 않는가? 매일 일상에서 보는 인간의 잔인함에 존재하며 세상 곳곳의 각종 범죄와 폭력에도 존재하네. 이러한 현상들을 악(惡) 이외에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에 학생이 대답했다. "교수님, 악(惡)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스스로 존재하진 않습니다. 악은 단순히 '하느님의 부재(不在)'입니다. 마치 어둠과 추위와 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악(惡)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빛, 열과 같은 믿음, 사랑과 악은 다릅니다. 악은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벌어지는 결과입니다. 이것은 마치 열이 없을 때 추위가 오고 빛이 없을 때 어둠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교수는 주저앉았다. 이 젊은이의 이름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이다. (권순성/김진섭님 카스 펌)
15.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하느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것이 여러분이 저와 함께 할 신앙교육의 시간, 예비자교리시간입니다. 지금 본보기로 말한 내용처럼, 신앙에 대한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논리학(論理學)이나 물리학(物理學)처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고, 인간의 지성만으로 그 최종의 결과에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에 관한 학문적인 접근을 ‘신학(神學,=Theology)’이라고 합니다만, 신학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학문 중에서 그중 차원이 다른, 가장 나중에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의 분야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학문적인 자격증도 주지도 않는 이 예비자교리시간을 통하여, 또 여러분의 거주지가 가까운 성당에 있는 저를 통하여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고 할 ‘신/하느님’에 관한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16. 제가 지금 간단한 본보기와, 제가 여러분에게 앞으로 할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했습니다만, 실제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삶에 신경을 쓸 시간도 없는데,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하느님이라든가 ‘신앙에 대한 이야기나 문제는 지금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실행한다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말로 그의 마음과 행동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하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콧방귀를 뀌거나 신경을 쓰겠습니까? 사람이 크게 관심을 가질 일이라면, 아마도 세상의 삶에서 손해를 입거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일 텐데, 신앙에 대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도 내 삶에 당장 손해나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할 테니,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신앙의 여러 가지 일들이 얼마나 영향이 있다고 여기겠습니까?
17. 신앙에 충실하겠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깝고 애석하다고 표현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내가 신경을 쓰고 마음을 쓴다고 해도 당장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나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 일’에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고, 그 결과를 보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 일, 신앙에 관한 이 일도 같은 입장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18. 세상의 대부분이거나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일에 우선권을 두고 움직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신앙의 일’에 시간을 내시는 여러분의 마음자세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제가 이렇게 힘들고도 힘들다고 말하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까요? 그래서 지금 내가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왔는데, 그 마음을 살려주기는커녕 ‘싹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분노하거나 흥분하는 마음을 드러낼까요? 사실은 제가 이렇게 불편한 소리를 합니다만, 결과가 그렇게 나오게 된다면 저도 반길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결과를 가져올 일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서, 제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일 뿐입니다.
19. 신앙에 대해서 시간을 내려는 사람에게, 신앙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사람에게 다가서는 제가 선택하는 방법이 최고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건 제가 가진 입장의 한계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대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다르게 대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한 자세를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있습니다.
20. 신앙의 모습은 이론(理論)으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도 그런 일이 이론으로 충분할 거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 이 시간에 만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때로는 다급하게, 때로는 아주 여유가 있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만날 준비를 하곤 합니다.
21. 여러분이 저와 만나는 이 시간을 통해서 신앙에 대한 자세를 만날 준비를 하신다면, 제가 그 마음을 읽고 그 상황과 사정에 맞추어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그렇게 시작한 일에 시간을 성실하게 마련하고 그 목적에 맞춰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내고, 제가 노력하고, 그 정성이 일치될 때 하느님의 은총은 여러분에게 큰 결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약속도 이 정도입니다.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