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7.2.) 구세주의 구원행위1 (=구속[救贖])
1.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의 삶에서는 중요한 것으로 말하는 장소와 시간에 대한 지식은 신앙에서 관심을 갖는 내용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을 이렇게 말로 설명하다보면 세상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길법한 것을 신앙에서는 왜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궁금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한다고 해서 그 대답을 당장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앙에서는 그렇게 세상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2. 세상의 삶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과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구별해서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분법을 적용해서 말한다면, 지난 주 교리시간에 말씀드린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된 얘기와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구세주의 구속행위에 관한 얘기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올바른 대답은 지난 주간에 들은 내용이 아니라, 오늘 듣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3. 삶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을 생각하거나, 일이 만들어지는 선후(先後)관계를 따지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탄생에 관한 내용이 앞서지 않으면 오늘 말씀드릴 구세주의 구원행위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성장해서 할 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세상에서 바라보는 일의 순서에 따른 것이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인간의 삶을 위주로 하느님의 일을 판단하려는 것이니, 권장할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선후관계를 따지고 인과관계를 말하지만, 하느님의 업적이나 일을 알려주는 입장에서는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을 전제로 해서 생각할 수는 없고,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하느님의 업적이나 구속행위를 인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세상에 하느님께서 특별한 일을 하시려면 인간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는 얘기가 가능해집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하는데 인간의 허락을 먼저 얻어야 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론적인 질문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세상에 하시는데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허락을 얻지 않으셨다는 것이니, 이 소리는 인간이 제아무리 뛰어난 머리와 지혜를 동원해서도 온전하게 이해하려고 해도 하느님의 일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나 행동방식과는 다른 하느님의 행동방식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받아들이기 싫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하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6.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는 문답59번항에도 적용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서,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십니다. 인간의 방식대로 이해한다면, 판매한 물건에 대한 애프터서비스(A/S)에 해당하는 얘기인데, 도대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왜 이렇게 하셔야만 했을까하고 질문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닌 것이 하느님의 행동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당신께서 준비하신 축복에 인간을 불러들이고자,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강생하셨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삶에 돈을 들이고 귀중하다고 말할 만한 물건들도 사용하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기 쉽고 수리해서 쓰게 되고, 수리비용이 생각보다 더 비싸지게 될 때에는 과감하게 내던지고 버리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데, 하느님은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해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복합니다만, 하느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하느님의 행동방식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속
7. 삼위일체의 제2위인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하신 일을 구속(救贖,=구원한 일)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다른 말로는 대속(代贖)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상응하는 값을 치루고 인간이라는 대상을 자유롭게 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낱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신 행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치기 전에 사람에게 물어보고 하느님이신 분일 원하시는 일을 인간의 입장에서 찬성하는지, 그렇게 돼도 괜찮은지 먼저 확인한 다음에 인간을 위해서 특별한 하신 것을 우리가 보속이나 대속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원하지 않았을(!) 텐데도, 하느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그 관할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원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관할권을 받은 인간이 그 관할권을 제 멋대로 사용하여 죄악의 길로 빠졌고,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에게서 도망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을 위해서 하느님이시면서도 하느님의 제2위인 성자가 인간으로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목숨을 내놓고 인간을 다시 구원의 길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서 하느님이 대가를 돌려받는 것도 아니고 감사의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닌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움직이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신 하느님이 딱하고 불쌍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하느님이 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8. 이 시간은 교회공동체의 교리를 설명하는 시간이기에, 성경에 나오는 얘기를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신앙의 내용을 말로 풀어 설명하는 방법으로 시간으로 사용합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입니다만, 성경의 얘기는 여러분이 직접 읽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한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자기 생각대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가 전하는 모습,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쓴(!) 모습을 보면 가관(可觀, =언행이 보기에 흉해 비웃을 만함)입니다.
9. 하느님께서는 세상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피조물을 다스릴 으뜸의 존재로 인간을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관리해야할 미물(微物,=작고 변변치 않은 대상)이었던 뱀으로 등장한 악마의 꾐에 빠져 하느님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던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기의 삶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방법을 선택했고 결국에는 하느님을 섬긴다는 부담감(!!)에서 탈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와 권리를 인간에게 주신 것이었으나, 인간이 그것을 다르게 느끼겠다고 작정하면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돌려놓겠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방법과 그 방법을 실행한 것이 바로 구세주께서 인간으로 탄생하시어 정하신 방법대로 하는 것이었고, 당신의 목숨을 내놓고 십자가상의 제사로 자신을 봉헌하시어 인간이 죄악의 길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10. 아담과 하와의 죄에서 시작한 인류의 행동은 형인 카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모습으로 발전했고, 결국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물과 홍수로 다시 쓸어내는 ‘홍수의 심판을 통한 세상정화의 방법’을 사용하시게 합니다. 인간이 홍수라는 심판을 불렀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입니다. 이 판단이 다르면, ‘하느님은 기껏 사람을 창조하여 만물을 다스리게 해놓고 인간이 잘못된 길로 갔다고 가차 없이 벌하는 아주 엄격하고도 자기만 아주 못된 신(神)’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홍수심판을 통해서 인류에게서 죄악을 쓸어내셨으나, 죄란 녀석이 그렇게 쉽게 인간의 삶에서 물러났을까요? 인간의 삶에서 죄악이 물러난다는 것은 ‘죄악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간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니, 그대로 됐을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고, 일이 그렇게 되는데 인간이 협조한 것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11. 홍수의 심판을 통해서 인류가 바뀔 수 있는 일을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셨지만, 시간이 흐른 후 인류는 죄와 악을 떨쳐버리지 않고, 창세기11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는 엄청난 일을 만듭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창세기성경은 ‘바벨탑사건’이라고 기록합니다. 노아의 홍수얘기와 바벨탑에 관련된 역사의 얘기는 역사의 흔적에서 그 모습에 일치하는 같은 특징을 찾지 못한다고 하는 논리에 따라 원역사(原歷事)/역사이전의 역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학문적인 접근의 방식은 이렇게 원역사라는 표현으로 말합니다만,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밌는 내용에 ‘개신교신자인 <김명현>이라는 재료공학박사(교수)’가 ‘창조과학’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박사님은 유투브에 소개된 내용에 ‘죄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만, 하느님의 창조가 원역사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일이고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12. 아담과 하와, 카인의 범죄, 노아의 홍수, 바벨탑사건으로 점점 커져간 인간이 만든 죄악은 아브라함(창세기12장)의 삶과 함께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실현하신 일로 직접적인 모습/직접 개입하십니다. 아브람(=훗날엔,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과 12아들, 그리고 4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그 다음에 해방된 다음에 가나안땅을 점령하고, 히브리인의 국가를 건국했다가, 바빌론유배를 거쳐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직접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 된 예수님에 관련된 일까지, 하느님의 역사개입은 점점 커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을 인간이 말 그대로 사랑과 관심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했느냐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13. 인간이 자기들의 삶에 불러들인 죄악은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어, 그 죄악을 대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주시기까지, 세상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기거나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활(公生活)기간 동안 복음을 선포하셨고, 그 결과로서 인류가 다시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알려주셨다고는 했습니다만, 그때 인간이 자기 삶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들어오신 후, 그 죄악이나 악한 행동이 인류나 사람들의 삶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속
14.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위를 가리켜 보속(補贖)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보속이라는 낱말은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사람의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삶에서 그 삶의 결과로 만든 죄와 그 결과를 어떻게 하면, 어떤 방법으로 자기 삶에서 치우거자 걷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쉽게 하는 방법은 돈으로 가능할 것처럼 생각하는 때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상대방이 돈의 힘을 인정하거나 그 돈을 바랄 때에나 가능한 소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로 작정하고, 죄를 자신의 삶에 불러들이고, 그 죄와 친구가 된 일에서 인간이 스스로 돌이키고, 죄에서 벗어난 결과를 만드는 것은 자기가 가진 힘만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때때로 몇 억 원이든지, 몇 천만 원이든지 하는 방식으로 계산합니다만, 죄에서 인간이 벗어난 결과를 만드는 일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돈으로 계산하는 방법이요 해석입니다.
15. 하느님에게서 생명(生命)을 공짜로, 값을 지불하지 않고 얻은 것이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자기 발로, 또 자기 판단으로 멀어지고 도망쳤다가 제 발로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는 없었다는 애기입니다. 이게 불가능했다는 얘기는 떠나는 것은 자유이지만, 돌아서서 다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일은 인간인 자기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다시 가능하게된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실행하신 보속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그 목숨’을 인류를 위해서 내놓으시고, 그 목숨을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물로 바친 다음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인간의 논리와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고,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기 맘대로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바람일 뿐이고, 실제로는 얼마나 가능한 일인지, 인간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16. 왜 그러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목숨이요, 사람의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 일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은 이렇게 말합니다만, 자본주의세상이 되고 난 다음,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남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계획을 세울 때, 남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하여 보상을 계산할 때 돈으로 그 값을 계산합니다. 이런 일이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판단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을 먼저 생각하는 이 시간에 우리가 그러한 일은 그르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세상에서 사라질 일도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판단하는 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17. 예수님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시기 이전의 시대를 가리켜 구약(舊約)시대라고 합니다. 그 구약시대에 사람의 삶을 지배했던 논리의 하나가 동태복수법이었습니다. 손해를 끼치면 같은 손해를 입히는 차원이니, 이 동태복수법은 보상을 전제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삶에 대한 도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처벌을 하면서, 그 처벌을 두려워하여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게 하려던 목적이 컸던 행동이라고 여기면 좋을 것입니다.
18. 그 동태복수법의 원칙을 적용하여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고 인류를 구속하고 속량(=값을 치루셨다!)하셨다는 말의 의미는, 인류가 죄를 지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원위치가 가능한 아주 큰 범죄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사정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세상에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고, 하느님을 거부했던 인간의 육체를 대신 봉헌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인류를 다시 선(善)하게 될 수 있는 길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순간에,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제물로 바친 예수님 자신의 몸이 죄악덩어리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삶에서 드러내는 태도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이 요즘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되나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죄를 보상하는 얘기에 그 정신이나 가치판단은 살아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동태복수법으로 ‘원수를 갚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동태복수법보다는 사람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명성과 능력을 돈으로 계산하고 돈으로 그 값을 계산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좀 더 건설적인 방법이겠습니다만, 다른 이의 삶에 손해를 끼쳤을 때에 같은 정도로 원수를 갚는 일보다는 그의 현실 삶에 도움이 되는 보상을 하는 것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동태복수법보다는 낫다고 말할 것입니다.
19. 죽음의 세력, 하느님을 대적하려고 했던 영적인 실체, 마귀는 예수님의 목숨을 죽음으로 잡아당기고,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으로 하느님을 상대로 하여 승리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 모든 사정을 다 알아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마귀는 예수님을 상대로 해서 거둔 잠깐의 승리에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인간의 계산법으로 딱3일천하로 끝납니다. 그가 승리했다고 여겼을 기간은 딱 그만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얘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 문답항목59번의 뒷부분에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구속행업의 목적을 신앙의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그 부분의 내용은 ‘예수님의 행위가 인간에게 영혼을 구하는 방법을 가리켜주시기 위함’이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보여주신 일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이며, 그렇게 배운 것을 어떻게 드러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최후만찬제사, 즉 미사성제/성체성사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지만, 사람은 예수님의 그 행위에서 어떤 것을 배우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배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삶에서 드러내겠느냐는 것입니다.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신앙교리를 말로 설명하는 단계이니, 정답을 당장 말로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을 지내고나면 우리는 반드시 그 질문에 알맞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1. 아직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훌륭한 대답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배울 수 있고, 내 삶으로 드러내야 할 것들은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다 말한 것들일 수도 있고 아는 것에 해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가 그에 대한 확신을 말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22.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셨지만, 인류에게 내려오시어, 성취하신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문답60번 항목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즐겨 받으셨다고 신앙에서는 말합니다만, 이 표현이 세상에서 우리가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서 움직이는 사람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표현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즐겨 받으셨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드러내기 쉬운 것과는 다르게, ‘꺼리는 마음 없이, 당신이 하시려는 일의 전체적인 상황과 그 일들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이루시려는 심정으로 고통과 고난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위를 본받아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놀라운 자세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과 똑같은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드러나는 모습이야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행위가 다른 대상에게까지 줄 수 있는 영향을 함께 본다면, 분명히 뭔가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23.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그 목숨을 봉헌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방법을 통해서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자기 통치행위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방해꾼이 된 사람들의 목숨을 세상에서 거두는 도구요 방법이었던 것이 십자가를 이용한 살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형과 그로 인한 죽음이라는 것이 대단한 일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십자가죽음의 형태에 대한 해석이지만, 예수님에게 적용된 이 일이 대단한 것이 된 이유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일에 순응(順應)하셨다는 것’때문입니다. 십자가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국가체제에 대하여 다른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형태의 살해라는 방법으로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일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러한 일로써 꺾을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4. 사람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끊는 일이 정상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국가의 폭력이든지 개인의 폭력이든지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공권력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일은 잘못된 것이고, 개인이 원한관계에 따라서 하는 일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모두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도 예수님처럼 피할 수 있는 ‘능력/힘’을 가지셨던 하느님이요 사람으로 오신 분이 그 일을 받아들였다는 데에서 우리는 특별한 자세를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일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생명체도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판단한다면, 그대로 수용할리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기본상식이지만, 예수님은 기꺼운 자세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뜻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살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말은 합니다만,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모든 의미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25. 우리 신앙은 예수님에게 ‘천주성과 인성’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사정은 인간인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혜나 지식을 동원하여 알아낼 수 있는 사실도 아닙니다. 신앙에서 그렇게 구별하고, 그에 따른 우리의 자세를 생각하여 삶에서 올바른 태도를 드러내자는 권고입니다. 61번과 62번 항목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논리로만 구별해서 하는 얘기가 될 소리입니다만, 천주성과 인간성이라는 낱말을 대하면서 말할 수 있는 차이점이 이 두 낱말의 크게 다른 점은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소멸하는 성질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하느님도 죽는 존재(!)라거나, ‘하느님도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대답을 상상의 결과가 어떠하겠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고, 그 미래가 어떤 모양일지 아는 것도 아닙니다만, 인간이 이렇게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의 생각을 담아 함부로 말한다면, 그가 드러내는 세상의 자세도 분명히 그렇게 표현하는 소리에 따라 변할 것입니다. 변한다는 얘기는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드러내도 좋은 일에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적용하고 드러내서 잘못된 길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26. 하느님이신 분이 하느님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를 사람처럼 내려놓으시고,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 결과로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신앙의 내용(필립피서2,6-11참조)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내용은 어떤 한 사람이 만들었거나, 어떤 한 사람이 정리한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당연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말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말씀은 우리들보다 앞선 그 누군가가 글로 남긴 사람(!)은 있겠지만, 그것역시도 그 사람이 쓴 독창적인 것,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담아서 글로 남긴 창작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방법은 분명,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으로 하신 것입니다. 신앙교리의 내용에 따르면 ‘인성(人性)’으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순전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도 하니, 결국 인간이 구원의 길로 가도록 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나 표현도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논리방법은 아닙니다만, 신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27. 한 사람이 드러낸 행위가 개인에게만 영향을 남기는 일을 넘어서서 전 인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힘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업적, 예수님의 행위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사람의 능력과 재능으로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그 값을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값을 계산하는 것은 인간이 실행하기도 하고 사람이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 인간의 손으로 그 존재를 좌우할 수 있는 대상에 한정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한계와 범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것에 대해 인간이 함부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겠다면, 그게 가능하지 않은 일인데도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느님의 명성에 하느님이 받으실 영광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기 기반(基盤)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고 그에 따라서 올바르게 한다는 것이지, 앞뒤를 구별하지 못하고 제 멋대로 나대거나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28. 하느님께서 ‘내가 인간을 위해서 특별한 모습을 보여줄 일의 의미는 이러이러하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께서 하신 그 일들을 대하면서 가져야 할 자세는 ‘사람의 한계’를 넘는 일을 하느님이 하셨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사람의 한계’를 넘는 힘겨운 일로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신 본보기가 있음을 기억하고, 그러한 일을 우리가 세상의 삶을 통해서 이룰 수 있도록, 바로 그분께 도우심을 청하고 그 도우심을 받아 나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대상에게도 신앙의 훌륭한 선물이 좋은 영향이 드러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제아무리 애써도 악령의 힘을 자기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의 싸움을 다른 신앙에서도 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다른 종교와 신앙에도 분명히 있기는 할 겁니다 -- 선과 악의 싸움은 세상의 논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말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9. 내가 악의 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만만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악의 힘이 내 앞에서 그렇게 작아질 수 있고 내가 바라는 것처럼 악의 힘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의 본보기를 듣고 배워서 세상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우리가 갖출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자세로, 악이나 죄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고, 삶에서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대항하여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30. 사람은 하느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신앙에 관련된 일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충실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말씀드리는 이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존재이고, 사람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일보다는 신앙의 일에 더 충실한 존재라는 등식이 성립(成立)한다면 좋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그렇다고 감히 말하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한계가 있는 행동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는 그 악을 이겨내기 위한 용기를 갖추는 것이라고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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