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7.2.) 구세주의 구원행위2 (=구속[救贖])
2015-0911. 이태원
1. (지난 시간보다 앞에 게으름을 덜 피웠더라면, 오늘 하는 내용의 일부를 지난 기회에 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오늘은 지난주의 내용에 이어서, 예수님에 지상생활=공생활과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복음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던 기간을 공생활(公生活)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한자의 뜻은 ‘함께 산 생활’이라는 의미이니 특별한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글자를 예수님의 이름이나 활동과 연결시켜서 말할 때는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움직이셨던 생애기간의 마지막3년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3년이라고 했습니다만, 성경학자들은 마태오-마르코-루카복음서를 연구하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3년이 아닌 1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3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공생활을 전하는 요한복음의 기록을 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하면서, 그분의 삶에 언급된 3번의 파스카축제를 말합니다. 그 근거에 따라,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할 때, 예수님의 공생활은 1년이라고 하지 않고 3년이라고 말합니다. 1년만의 활동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3. 공생활은 예수님의 복음선포기간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셨고,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하러 오신 사람이셨으니, 하느님으로서 놀라운 기적을 단 한 번만 행사하셨어도 당신이 처음부터 하려던 일의 효과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한번에 그 일을 끝내지 않고 3년 동안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에 확실성이 없거나 자신감이 없어서 반복했다고 알아듣는 것보다는 ‘복음선포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두 번이나 세 번의 의도를 담아서 반복하신 일’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번만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돌아가는 관계로 두 번이 세 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4. 예수님의 삶을 대하면서 인간이 범하기 쉬운 실수의 하나는 ‘하느님이신 분이 기적을 한번 찐하게 베풀어서, 인간을 완벽하게 바꾸어놓으면 되지, 왜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복음을 선포했고, 결국 성공하지도 못했으면서(!) 사람을 바꾸려다가 헛되이 죽기만 했지? 그것도 비참하고 고통스러웠을 십지가의 죽음으로 말이야?’하고 우리가 예수님과 하느님을 많이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묻거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일 뿐입니다. 인간을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가 읽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아무런 판단도 하지 못하고 생각도 하지 못하면서 그저 로봇처럼 움직이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보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자세이며, 신앙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범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멀어졌던 인간이 삶의 자세를 돌이키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기적을 행하시어 사람을 바꾸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인간으로 나게 하시고 그의 생명을 제물로 받으심으로써 인간의 마음과 자세를 바꾸려고 하려던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좋은 것은 챙기고, 나쁜 것은 피하면서 일이 돌아가는 책임을 하느님에게 묻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과 그 이후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이 63번과 6번의 문답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오늘날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은 세상의 삶을 마치고 난 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역사가와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날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은 서기 30년 4월7일 금요일 오전9시였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말하는 제가 여러분에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고통은 낮12시를 넘기고 오후3시가 되면서 끝납니다. 고통이 끝났다는 것은 그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 사람의 생명이 다하여 목숨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나라(=하느님나라)를 말하고 그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국가반역자를 죽인 것이었으니 세상제국의 승리였을 것이지만, 신앙의 해석에서는 그 일을 다른 입장에서 봅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던 방법으로, 죄로 기울어지기 쉬웠던 육신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고, 세상의 사람들이 하느님과 다시 일치하여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받아들이고 완성하신 십자가위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해석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해석이라고 여길 것이고, 하느님은 무능력한 신이 될 것입니다.
6.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것을 가리켜, 제사라고도 하는데, 구약시대의 제사는 흔히 동물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예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거역사가 곡식을 제물로 바치던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유목민족, 우리는 농경민족이라는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제사를 지낸다면서 다른 사람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인신공양/人身供養)은 아니었으니, 구약성경이 적는 여러 가지 제사에 대한 것을 본다면, 양이나 염소, 혹은 소를 제물로 바치곤 했습니다. 제물로 잡은 동물을 불로 태우는(=번제)방법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그 동물의 피는 모두 빼서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피는 생명이라고 했으므로) 제단주변에 붓는 것이 제사의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사의 방법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의 모습이 있기는 했습니다만(=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와 신앙),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을 최초의 제물로 인정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7. 이렇게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몸은 구약의 경우처럼, 번제로 바쳐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기억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위의 제사봉헌이 있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하는 최후만찬의 예절을 통하여,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이 십자가상 제사를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라면 빵이면 빵이고, 포도주이면 포도주이지....라고 말하기 쉬우나, 예수님/하느님의 선언으로 우리는 미사에 와서 빵과 포도주를 대하면서도 예수님의 몸과 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8. 십자가상 제사/십자가위의 죽음이 서기30년 4월7일 금요일 오후3시경에 끝나고,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묻힙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신앙의 내용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숨을 거두신 후,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이 마련한 무덤, 아무도 묻힌 적이 없던 새로 만들어놓은 준비된 돌무덤에 묻히셨다고 합니다.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은 골고타(=해골)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장소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면 구(舊)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산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도시로 발전한 곳에 있고, 지금은 그 위에 꽤나 큰 예수님의 부활성당(=사실은 죽음이 먼저 있었지만, 부활성당이라고 부른다)이 있습니다.
9. 예수님의 죽은 몸은 무덤에 묻히셨고, 그 몸이 무덤에 머물러있던 시간에, 예수님의 영은 림보/고성소/저승에 가시어, 아직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의 삶을 통하여 올바른 삶의 모습을 보였던 성인들을 찾아서 위로했노라고 신앙에서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현장을 확인하고 그렇게 확인한 것을 글로 기록하고, 믿음의 내용으로 남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신 곳을 가리켜, 예전에는 ‘림보’라고 말했고, 그리고 얼마 후에는 ‘고성소’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신앙고백에서는 ‘저승’이라고 부르기에 신앙의 용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안타까움은 있습니다만, 제가 달리 바꿀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10.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직 부활하지 않았을 그 순간까지,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도 하늘나라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다음에서야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내용도 누군가가 눈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기록한 내용은 아닙니다. 이렇게 닫혀있었다고 말하는 하늘나라의 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과 함께 그 문이 열렸다고 말하는 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11. 문답65번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3시에 세상에 오신 인간으로서 그 생명을 마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똑같이 가야하는 길입니다. 아닌 사람은 없고 예외인 사람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경험할 수 없다고 한 일, 사람이 체험할 수 없다고 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이 3일 만에 일어났어야 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굳이 구약성경에서 그 본보기를 찾으라고 한다면, 요나예언자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3일간 지냈다는 본보기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3일만이라고 했습니다만, 금요일 오후에 일어난 그 사건 후, 사람들이 그분의 부활을 확인하고 알아들은 것은 안식일 다음날(=지금의 주일)새벽/해가 뜬 다음(=공식적인 통금이 해제된 이후시간)이었습니다.
12. 예수님을 십자가위에서 죽게 하고, 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할 때는 금요일 해가 지려고 하던 시간이었고, 그렇게 시작된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 순간이라서 통금이 되기 전에, 예수님의 시신은 서둘러서 무덤에 안치됩니다. 그러니 시신에 대하여 합당한 여러 가지 예절들은 모두 생략됐을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는 것을 보았던 여인들은 그 일들을 기억하고, 안식일이 끝나고 난 다음,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고 찾아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발견한 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실처럼,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서 숨겨놓고, 부활했다고 주장한다고 여겼습니다.
13. 예수님이 죽으신 후, 그분의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맞춰 그분의 영혼과 육신이 다시 합치되는 것을 본 사람도 없겠지요? 사람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다 쓰고 나면,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숨이 인간의 몸을 빠져나갑니다. <영혼의 무게: 21g???> 그걸 죽음이요, 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표현하거나 부활하셨다는 소리는 우리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닌, 영혼과 육신이 다시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세상에서 40일간 머무셨다고 신앙에서는 말합니다. 이런 사실도 그 누군가가 보고서 확인한 것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것을 이 시간에 말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은 무척이나 똑똑하고 현명할 것처럼 보여도, 그게 마음과 바람과는 달리 모든 일에 있어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40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바로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고 40일을 지상에 머무르셨다고(=실제로 어디에 몸을 두고 계셨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합니다만, 그 기간에 무슨 일을 하셨을까 하고 우리가 묻는다면 그 대답은 66번의 문답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15. 부활은 말 그대로 그 현실을 체험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증명하거나 증거를 댈 수는 없는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3년간 제자들과 함께 사셨던 기간 동안 하셨던 일을 뒷마무리하신 기간으로 사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기간동안 제자들을 교육하셨다지만, 제자들이 확실하고도 확고한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는 기록은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16. 지금 말씀드린 40이라는 숫자에 대하여, 노아의 홍수 때 하늘에서 배가 내린 기간도 40일, 히브리백성이 이집트의 갈대바다를 건넌 뒤, 모세가 12부족에서 대표를 선발하여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하는데 걸린 시간도 40일, 히브리백성이 광야를 헤매며 준비한 기간도 40년,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의 계명인 십계명을 받는데 사용한 시간도 40일, 하느님의 위대한 예언자였던 엘리야가 카르멜산에서 시나이산까지 아합 임금의 박해를 피해서 이동한 기간도 40일이었습니다. 히브리민족이 성립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바빌론유배기간도 40년(BC 587-538), 예수님께서 사순절기간 동안 사용하신 시간도 40일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17.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40’이라는 숫자나 길이는 특정한 대상의 사람들이 뭔가 준비하는데 사용한 시간이었다고 알아들으면 좋을 신앙의 해석입입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시간은 흔히 예수님께서 지상에 머무르셨던 기간 40일에 성령이 강림하기를 기다렸던 기간 10일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부활시기는 50일로 계산합니다.
18. 지상에서 40일을 머무르신 다음, 예수님은 하늘로 오르십니다. 승천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성이 바라보이는 동쪽언덕,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19. 오른편은 영광과 권세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헌데, 세상에서는 왼편의 힘이 더 강하다고 말하나요?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정부직책에서, 우의정보다 좌의정이 더 높은 직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하는 소리입니다.
20. 예수님이 누리실 영광은 68번의 항목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인간으로 태어나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하신 다음, 다시 하늘로 귀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옛날의 영광으로 가셨다는 것도 우리가 확인하고 증언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면,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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