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3)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0) - 마지막 예언자, 말라키
숨은 ‘의인’들 응원하며 끝까지 신앙 지킬 것 권면
■ ‘마지막’의 의미
말라키는 기원전 약 500년에서 450년 사이에 활동한 마지막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실로 말라키 이후 400여 년간 예언말씀은 뚝 끊겼다. 말이 400년이지 ‘계시’로 태어나 ‘계시’를 먹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너무도 혹독한 천형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중간사(中間史)라고 부른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끼어 있는 애매한 시기,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의 소통이 소원했던 침묵의 세월이자 격조의 기간!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용어일 것이다. 여기서 예언말씀이 시대구분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주목할 일이다. 왜냐하면 예언말씀이 끊기면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비상이 걸린다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느님은 ‘말라키’가 이른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가 될 것임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비장하고 결연한 기운을 수렴한다. 존재의 지속을 위하여 특단의 채비를 차릴 것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극한 국면에 대한 대비책이라 할까.
■ 400년 고난길의 노자(路資) 말씀
먼 길을 갈 때 챙겨서 가는 여비를 ‘노자’(路資)돈이라 부른다. 옛날 교리에서는 병자성사를 ‘노자성자’라고도 불렀다. 죽음의 먼 여정, 황천길을 갈 때 필요한 은총을 챙겨 받는다는 뜻에서다. ‘마지막’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에도 이 ‘노자’의 성격이 짙게 서려있다. 그러기에 400년 고난길의 ‘노자’ 말씀이란 관점에서 그 내용을 반추해 보는 것도 은혜로운 각성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말씀이 내려질 당시 상황은 즈루빠벨 성전이 재건되고 그 후속 마무리가 지지부진한 채, 여전히 영적 혼란, 태만, 나아가 불순히 판치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던져지는 물음은 터무니없이 거창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향후 400년 고난의 역사를 견뎌내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신앙과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렇듯 원대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말라키 예언이라고 봐도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말라키 예언의 배경적 윤곽은 십계명이다.
“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말라 3,22).
알다시피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으로 요약되는 상3계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하7계로 구성되어 있다.
말라키서는 먼저 ‘하느님 사랑’의 방편으로서 경신례를 관장하는 사제들을 향하여 포문을 연다. 전체 3장 가운데 1장과 2장의 주요 내용이 사제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에 할애되고 있다. 제물을 바칠 때의 불경한 마음과 무성의(말라 1,6-10 참조), 게으름과 눈속임(말라 1,13-14 참조)에 대한 지적을 넘어 마침내 재앙을 예고하는 살 떨리는 어투의 말씀에 이른다.
“사제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법을 찾으니/ 그가 만군의 주님의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계약을 깨뜨렸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리라”(말라 2,7-9).
사실상 이 말씀은 심판 예고로서보다 사제들의 영적 환골탈태와 참예배의 회복이 유일한 살길임을 강조하는데 더 큰 의의를 지닌다. 역경을 견디는 가장 신통한 비책은 넓은 의미의 ‘기도’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씀이 예고하는 불행은 그로부터 약 250년 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통해 결정적으로 실현되었다(마카 1,20-64 참조).
이어지는 주제는 혼혈혼과 이혼에 대한 경고다. 먼저 그 이유가 명확히 제시된다. “유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분의 성소를 더럽히고 이방 신을 섬기는 여자들과 혼인하였다”(말라 2,11). 그러므로 유다인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고, 성스런 부부의 연을 통하여 “하느님께 인정받는 후손”(말라 2,15)을 대물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라키서는 ‘이웃 사랑’에 대한 본격적인 말씀도 생략하지 않는다(말라 3,5 참조). 특히 “품팔이꾼의 품삯을 떼어먹고/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이방인을 밀쳐 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함으로써 그 반대급부의 삶에로 적극 초대하고 있음에도 주목할 일이다.
요컨대, 시련기를 살아남을 묘방,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다. 비정상에서 정상으로의 회귀! 귀가 닳도록 들은 십계명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것! 그 상식 속에 400년 생명을 지속할 비책이 있는 것이다.
■ 새 시대를 향하여
말라키서는 도처에 숨은 ‘의인’들을 응원하면서 끝까지 신앙에 충실할 것을 권면한다(말라 1,11.14 참조). 이들에게 가장 큰 격려는 ‘그 분’ 메시아 시대의 도래다. 하여 예언서는 확언한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오실 ‘사자’는 다름 아닌 엘리야 예언자다(말라 3,23 참조). 그가 오면 악인들은 불속에 타버리는 ‘검불’(말라 3,19)처럼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의인들을 위해서는 응분의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말라 3,16-17).
“의로움의 태양이” 떠오르는 그날은 치유와 기쁨이 될 것이다(말라 3,20 참조).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격려는 이를 누릴 주인공들의 이름이 비망록(생명의 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씀이 내려진지 400여 년 후, 저 예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등장으로 진실이 되었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열렸다.
구약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 이르니, 장구한 기다림의 길목에서 시대의 의인들이 끈질기게 바친 뭍 기도소리가 귓전에 웅성거린다.
입때껏
생(生)의 모든 것인
제 이름,
당신의 수첩에 적혀 있겠지요.
나름
당신을 전능 천주(天主)로 알아 뫼셨고
당신의 이름을 기뻐 송축하였나니,
제 이름 석자 당신의 비망록에 올라
당신의 것, 당신의 귀염둥이로
금이야 옥이야 영영 사랑받겠지요.
도처에서 이런 기도가 올려졌으면,
무시로 이런 희망을 가진 이들이 늘어났으면,
검은 침묵만 흐르는 세월의 강 이편저편에서
저 노래를 흥얼거리는 심령들이 바글거렸으면,
좋겠네!
꼭 그랬으면,
나 흐벅지게 좋겠네.
필경 그럴 것이기에
기약 없는 기다림마저 설레나이다.
하여
옛 약속 뒤로한 채,
새 약속 목 빼어 고대하는
우리의 합창은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복된 설움과 눈물의 환희로 다시 불러보는,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13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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