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5)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2) - 길 닦는 자, 요한 세례자 (하)
그리스도 맞이할 준비시키며 회개의 삶 촉구
■ 거침없는 선포
요한 세례자가 홀연 광야에 나타나 첫 번째로 선포한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이후 요한 세례자의 언행은 모두 이 한 문장의 구현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저 문장을 당신의 첫 선포 근간으로 삼아주셨다(마태 4,17 참조). 그 위에 ‘죄의 용서’라는 엄청난 희소식(복음)에 대한 믿음을 종용하는 문구를 추가했을 따름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위 두 문장의 단순비교만으로도 예수님 복음 선포가 얼마나 요한 세례자의 선포업적으로부터 탄력을 받고 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어쨌든, 요한 세례자 발(發) 광야의 소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은 그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헐렁하게 세례만 주지 않았다. 매번 회개의 열매를 엄중하게 요구하였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 루카 3,8).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운가 싶으면서도 쉬운 말이다. 이에 사람들의 실질적인 물음과 요한 세례자의 답변이 줄을 잇는다.
먼저 군중이 묻는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답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다음으로 세리들의 똑같은 물음에 요한이 답한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
그리고 같은 식으로 군사들에게 답한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
요컨대, 군중들에게는 ‘나누고 베푸는 삶’을, 세리들에게는 ‘정의’를, 군사들에게는 ‘청렴’을 강조했다. 이 내용들은 전부 각자의 직업과 처지, 각자의 상식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는 미카 예언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미카 6,8).
답은 멀리 있지 않다는 얘기다. 몰라서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얘기다.
만일 요한 세례자가 오늘 우리에게 나타난다면, 우리를 향한 주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곧 각자의 생활 터와 직장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청일 터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지는 베풂의 기회, 의로운 처신의 기회, 정직한 행동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저분이시다!
요한 세례자의 풍모와 언설에서 여간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가 발산되니 사람들은 점점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더구나 기득권 세력인 바리사이 및 사두가이를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마태 3,7)라는 도발적 독설까지 불사하니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예루살렘 일대에 연일 뉴스특보감이었다. 그의 메시지에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사제를 주축으로 하여 고위 사제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명하였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봐라.”
이렇게 해서 사람을 보내는데, 일단 사제들과 레위인을 보낸다. 그리고 바리사이 역시 그들대로 사람을 보낸다. 이렇게 양쪽 본부가 사람들을 보내어 세례자 요한에게 묻는다(요한 1,19.24 참조).
“요한! 당신이 누구요? 당신은 메시아요?”
“아니오.”
이어지는 질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길 닦는 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확실히 표명한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에 사람들이 따져 묻는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25)
요한이 응답한다.
“내가 주는 세례는 단지 씻는 예식이오. 준비하는 예식이란 말이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오”(요한 1,26 루카 3,16 참조).
요한 세례자는 정확하게 어디까지가 자신의 역할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곧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것이었다(요한 1,34).
과연 그는 자신의 역할에서 칼같이 멈췄다. 그러기에 그는 독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몰려든 제자들의 발걸음을 예수님께로 돌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요한과 안드레아다. 마침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다가 제자들에게 등을 떠밀다시피 말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바꿔 말하여, “저분이시다! 저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가차 없이 저분을 따라라”라는 권고다. 요한 세례자다운 처신이다.
■ 당신이십니까?
그런데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입때껏 “저분이시다” 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패륜을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질문을 전한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그에게 왜 이 물음이 중요했을까? 본능적으로 죽음의 임박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완수를 예수님께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답이 오건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가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알다시피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였다. 요한 세례자에게는 이 한 마디로 족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예기했던 바였기 때문이다.
이제 여한이 없다. 오라, 죽음아! 오래지 않아 돌연 참수령이 내려졌다. 죽음의 순간, 시간은 길이를 초월한다고 한다. 요한 세례자는 참수의 찰나 무한길이의 시간 속에서 어떤 기도를 바쳤을까. 불현듯 한 줄기 심령의 포효가 들리는 듯하다.
당신이셨군요.
저는 그저 제 마음속 영감을 따라
선포했습니다.
때론 겁박으로, 때론 웅변으로, 때론 돌직구로
그러나 ‘사랑’ 한가득 담아
외쳤습니다.
‘당신의 길’ 곧게 내는 일(요한 1,23 참조)이라면
단 하나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서슴없이 전했습니다.
당신이셨군요.
당신이셨군요.
‘당신의 길’을 닦은 죄로
저는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패륜의 권력자에게 ‘당신의 절대 명령’ 10계명을 강변한 죄로
저는 참수 요절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당신이셨군요.
안녕, 당신께 안도의 안녕을 고합니다.
당신이셨군요.
이 순간 푸른빛 칼날이
목을 향하여 날아오네요.
이담, 하늘 나라에서
당신의 신발끈을 풀 역할이 제게 허락된다면,
이 생(生), 후회 없는 질주이겠습니다.
당신이셨군요,
그토록 흠모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제 생을 바쳐 ‘짝사랑’만 해야 했던
정녕 당신이셨군요.
사랑합니다.
사랑해-읏…!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27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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