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63) - 복음의 변증가, 바오로 사도
드라마틱한 회개 거쳐 이방인의 사도로 변신 ■ 열혈 박해자의 변절 바오로로 개명되기 전 본명은 사울. 본디 그는 박해자였다. 악명 높은 그의 활약은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직후부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다.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 더 멀리는 다마스쿠스까지 흩어지자, 그는 유다 지도자들로부터 권한 위임과 군사 지원을 받아 활약 범위를 점점 넓혀간다. 사울의 박해는 매서웠다(사도 22,19 참조). 어쩌다가 그는 열혈 박해자가 되었을까? 한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자신이 신봉하던 율법을 거스르거나 왜곡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을 소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그의 가슴은 율법 수호의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이것은 야훼의 뜻이다. 우리 조상들의 종교, 모세의 율법을 사수해야 한다. 사도(邪道), 곧 거짓 도리를 퍼트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그랬는데, 돌연 사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긴다. 도상에서 ‘번개 같은 섬광’에 맞고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이에 사울은 눈이 먼다(사도 9,3-5 참조). 사울은 이후 드라마틱한 회개과정을 거쳐 ‘이방 민족들을 위해’ 선택된 그릇이 된다(사도 9,15 참조). 이를 후세의 역사가들은 유럽 문명의 판도를 뒤엎은 결정적인 사건이요 구세사의 궤적을 바꾼 인류적 사건으로 기록한다. 이리하여 부제 스테파노의 처형에 동의하였던 열혈 청년 사울은 이제 ‘바오로’로 개명되어, 스테파노가 장렬하게 감당했던 ‘예수의 이름으로 겪어야 할 고난’(사도 9,16 참조)의 길을 가게 된다. 이후 죽을 때까지 그의 평생 행로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을 누비는 복음전파의 여정이었다. ■ 복음의 진수: 율법에서 은총으로 열두 사도들은 대부분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율법을 심도 깊게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달랐다. 그가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다는 사실은 율법에 정통했음을 뜻한다. 더구나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 그랬기에 그는 율법의 광적 신봉자였다. 이 사실은 처음에는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큰 장애가 되었지만, 개종 후 ‘복음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는 결정적 강점이 되었다. 율법의 소중함을 아는 만큼, 그 약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율법을 깊이 공부할수록 율법 자체가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주지 못함을 깨달았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인지를 명료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할 뿐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율법의 한계를 이렇게 고백한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마 7,21-24). 누구든지 바오로의 이 고백을 조금만 깊이 곱씹어보면 이런 비극이 자신의 내면에서도 매일, 아니 매 순간 발생하고 있음을 시인하게 된다. 바오로뿐 아니라 누구든지 ‘내적’으로는 ‘하느님의 법’ 곧 율법을 반긴다. 그것이 좋은 길을 제시하는 줄 잘 안다. 하지만 인간 지체 안에 ‘다른 법’이 도사리고 있다가 ‘이성의 법’ 곧 율법과 대결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악을 행하고자 하는 육체의 법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이성의 법을 굴복시켜 ‘죄’를 짓게 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비참’하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출구는? 바오로 사도는 그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 7,24). 바로 이 지점이 ‘복음’의 진수가 드러나야 할 대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십자가 죽음의 희생제사로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써”라고 바오로는 답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죄인들에게는 거저 용서받는 ‘은총’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복음에 대한 바오로의 요지는 이렇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곧 복음인 것입니다.” ■ 복음에 미치다 복음의 진수를 깨우치고 나니, 다혈질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 온통 ‘율법’에 쏟았던 열정을 이제 ‘복음’에 집중하게 되었다. 복음에 관한한 그는 미치광이였다. “우리가 정신이 나갔다면 하느님을 위하여 그러한 것이고,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다면 여러분을 위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3-14). 한 편의 시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미쳐도 좋다. 복음을 전하도록 사랑이 ‘다그치기에’. 그러함에 그는 말한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그가 쓰레기로 여겼다는 것은 지난날 그의 최고 자긍심이었던 바리사이의 명예, 하늘 높이 쌓았던 율법 지식, 로마 시민의 특권 등 아주 실제적인 것들이었다. 이 정도였으니,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무엇인들 마다했을까.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 9,19-23). 너무 감동적이라 길지만 전문을 인용했다. 이 고백에는 부연 해설도 사족일 것이다. 단지 그의 선창을 따라 짧은 기도를 함께 바쳐볼 뿐이다. 제가 미쳤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인하여, 제가 맹목에 빠졌습니다. 제가 미쳤습니다. 율법의 늪에서 저를 건져주신 그 공짜 용서로 인하여, 제가 황홀에 들었습니다. 제가 미쳤습니다. 그 복음 모든 이에게 전하고픈 강박으로 인하여, 제가 안달이 났습니다. 덜 미쳤습니다. 당신 사랑의 천길 깊이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미달입니다. 더 미치고 싶습니다. 흐드러지는 구원의 은총 울며불며 노래하려면, 더 취해야 합니다. 더 미치게 하소서. 남은 자긍 쓰레기로 여기고 복음에만 골몰하도록, 거룩한 광기를 부어주소서.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0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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