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교리] 기도, 하느님과의 만남 우리 마음에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망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을 찾고 또 그분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그분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 그분의 모습이 담긴 사람을 통해, 그리고 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기도는 앞에 언급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말씀, 피조물, 인간, 성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에는 이에 덧붙여 그러한 하느님을 알아본 우리의 ‘응답’이 담겨있습니다. 이 응답이 하나의 상호작용, 곧 ‘만남’을 이루어냅니다. 생활 : 만남 만남. 마음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만남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만남, 당황스러운 만남, 운명적인 만남. 우리는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상대방을 알게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의 생김새와 인상부터 시작하여,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이름이나 직업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또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더 많은 대화를 이어가며 마음을 엽니다. 만남이 계속되고 관계가 깊어지면, 그 사람은 단순히 ‘아는 사람’의 차원을 넘어 ‘소중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만남은 서로 간의 교류를 전제로 합니다. 길을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그 사람과 인사를 하지 못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을 ‘보았다’고 하지 ‘만났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남은 만난 사람들 사이에 인사나 대화와 같은 교류가 있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의식 안에 존재하게 되고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최근에 저는 조카를 만났습니다. 6개월 된 아기였습니다. 조카는 해맑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만 같았습니다. 제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안아볼 기회가 생겼는데, 처음 안을 때에는 낯설고 불편해 하더니, 다시 안을 때는 자연스럽게 제 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잠시 뒤 아기 아빠가 와서 조카를 안았는데, 아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까꿍 놀이를 하며 아기와 교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기도 웃고 우리 모두도 웃었습니다. 아기가 크면 그때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저를 바라보면서 미소 지으며 저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빠가 아기의 언어로 다가가 교감하는 것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아빠가 ‘까꿍’하며 말을 걸자, 아기가 ‘웃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웃었습니다. 교리 : 기도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신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잊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더라도, 자신의 우상을 좇거나 또는 자기를 버렸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더라도, 살아 계신 참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기도에서, 성실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의 행위는 언제나 앞서는 것이요,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67항).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먼저 하느님께 말씀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리서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교리서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있어도, 심지어 외면하고 있어도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도라는 신비로운 만남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기도는 이러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 이것으로 하느님과 인간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기도는 ‘응답’이기에 인간이 하느님을 단순히 알아보는 것을 넘은 상호작용이 있고 이러한 까닭에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이러한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그래서 교리서는 기도가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다.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기도의 표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62항). “마음은 내가 존재하고 내가 머무는 거처 … 바로 진리의 자리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은 서로가 만나는 자리이며, 계약이 체결되는 자리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63항). 말씀 : 마음이 겸손한 이들의 기도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6-8).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은 겸손한 마음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초라한 골방에 숨어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지 못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대등하거나 우월한 관계에 서있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올바른 상호작용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복음에서 의롭게 된 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하느님께 기도한 바리사이가 아닌 다음과 같이 기도한 세리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그래서 교리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는 그 첫 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가? 우리의 교만과 우리 자신의 원의라는 고자세에서 하는가? 아니면, … 뉘우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가? … 겸손은 기도의 초석이다. …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이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59항).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기도는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만남입니다. 우리를 먼저 찾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도로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 만남은 이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부르셨음을 기억해 봅시다. 이 기도의 순간을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셨음을 느끼고, 이미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그분께 나의 바람을 아뢰어 봅시다. - 기도는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려봅시다. 교회가 제시하는 기도문으로 기도한다면, 그 기도문에 마음을 담아봅시다. -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기도합시다. 그때에 참된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그리고 깊은 청원의 기도가 마음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 자체가 하나의 은혜가 될 것입니다. * 고성균 요한 세례자 - 도미니코수도회 수사. 현재 수도회 지원기 양성 담당자 소임을 맡고 있다. 단순하고 즐겁게 형제들과 어울려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 [경향잡지, 2015년 12월호, 고성균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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