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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리를 찾아서: 사람이 되신 말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23 조회수3,072 추천수0

[진리를 찾아서] 사람이 되신 말씀

 

 

우리는 성탄시기를 보내며 2016년 새해를 맞이합니다. 성탄시기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신비를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단순히 한 위대한 사람의 출생을 넘어, 하느님의 아들,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육화)의 신비가 담겨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가 있습니다.

 

 

생활 : 대면

 

오늘날 우리는 많은 의사소통의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지, 전화, 문자, 전자우편, 채팅, 심지어 화면을 통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의사소통을 하기도 합니다. 이제 소통의 속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고, 휴대전화와 같은 의사소통 기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전달합니다. 메시지나 목소리 속에 담긴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냅니다.

 

하지만 최고의 의사소통은 상대방을 직접 만날 때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만일 상대방이 그리움의 대상이라면, 그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더더욱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저는 3년 반 동안 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기에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오질 못했습니다.

 

가족들과는 전자우편이나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가족의 얼굴을 못본 것은 제 인생에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가 살던 곳으로 성지순례를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뵙지 못했던 어머니를 뵐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공항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 느낌, 그리고 3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는 그 느낌은 아직도 제게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냥 그 순간이 너무 설레고, 감사하고, 또 기뻤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건강해보여서 더 좋았습니다.

 

순례단의 허락을 받아 어머니를 제가 살던 수도원으로 잠시 모셔와 함께 식사도 하고 수도원 형제들을 소개시켜 드린 것이 저에게는 지금도 마음 벅찬 추억입니다.

 

아무리 의사소통의 수단이 발달해도, 직접 만나는 것처럼 총체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습니다. 내 앞에 바로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표정을 읽고 몸짓을 느낍니다. 손을 잡거나 포옹하면 그 만남은 더 깊어집니다.

 

 

교리 : 강생(육화)

 

교회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 복음 1,14의 표현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인간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이라고 부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61항 참조).

 

우리는 성경, 피조물, 인간, 성사,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납니다. 하지만 그분을 ‘직접’ 만나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분 이 시기에 위에 언급한 수단들을 통해서 그분을 만날 수 있지만, 역사의 한 순간에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 본성을 취하셔서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강생하셨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이다. …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 초창기부터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신비’로 노래한 기쁨에 찬 확신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63항).

 

또한 교리서는 말씀이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거룩함의 모범이 되시려고’,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고 천명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56-460항 참조).

 

 

말씀 : 종의 모습을 취하신 말씀

 

“처음부터 있어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1-2).

 

하느님의 말씀, 참생명이 사람이 되어 나타나셨고, 그분을 직접 듣고, 보고, 만져보는 감격은 어떠할까요?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역사 안의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체험합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그분께서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자신의 주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강생의 신비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겸손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종의 모습을 취하셨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생명이신 분께서 우리를 죽을 운명에서 구하시고자 죽음을 끌어안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참생명으로 나아가려면 예수님의 마음, 곧 사랑과 겸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강생에는 우리와 다른 분[초월]이 우리와 똑같아지신[내재]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이상이 이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습니다. 또한 강생의 영성은 가난과 자기비움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순종으로 종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가 본디 지닌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 하느님 나라를 단순히 죽은 다음에 가는 이상적인 장소로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고 또 건설해 봅시다.

 

창조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아지셨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가 될 수 없지만, 창조주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으로써 우리는 더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하느님의 선을 느껴봅시다.

 

- 겸손의 자세를 지녀봅시다. 겸손은 자신을 비난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심지어 자기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공동체 안에 약자들이 있다면,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과 함께합시다.

 

- 아기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가난과 순종의 길을 따릅시다. 우리는 세상의 부를 추구하고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강생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분의 사랑에 기뻐합시다.

 

나와 우리는 그분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 고성균 요한 세례자 - 도미니코수도회 수사. 현재 수도회 지원기 양성담당자 소임을 맡고 있다. 단순하고 즐겁게 형제들과 어울려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

 

[경향잡지, 2016년 1월호, 고성균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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