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선거용 민주주의
국민 대변하는 제대로된 정치를 선거철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는데, 돌아가는 꼴은 강호의 무림천지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대통령에서부터 지역의 국회의원을 꿈꾸는 사람들까지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예사롭지가 않다. 모든 게 선거를 앞둔 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선거철에 맞춰 각 정당의 경쟁도 서로 날카로워지고, 각 정당 내부에서도 후보자 공천 기준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자기 정당 안에서, 그리고 자기 지역구 안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경쟁과는 달리 진짜 고민해봐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이 없다. 이미 브라질이나 멕시코와 같은 수준으로 치달은 양극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평화에 대해서, 그리고 양극화에 대해서 정부와 다른 견해를 드러내면 어김없이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정치적인 꼬리표가 붙여진다. 무서워서 그런 건지 더러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정치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보수는 개혁”이라는, 마치도 “동그라미는 네모”라는 말장난만 난무하다. 원래 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해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회적 집단 사이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타협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를 정치적 결사체, 즉 정당이 정치적으로 대표(representation)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각각의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치 결사체가 제대로 존재하거나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 농어민,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정당은 제대로 제도권 정치 안으로 들어오기 힘들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선거제도가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두 거대정당은 전체 유권자의 투표수에 비해 과잉 대표되고 있으며, 반대로 소수의 정당들은 과소 대표되고 있다.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런 현상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얼마나 훼손하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부산광역시 의회 선거에서 특정 거대 정당의 득표율은 67% 정도였지만, 20년간 줄곧 시의회에서 이 정당의 의석수는 거의 100%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보수적인 언론과 정당의 정치적 선전도 한몫을 더한다. 수출 대기업을 우선적이고 중심적으로 지원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면, 그 혜택이 모든 국민에게 돌아갈 것인 양 선전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극소수 부자들의 자기변호에 불과(영국주교회의 「공동선」 72항)하다. 이런 결과로, 두 거대 보수 정당이 모든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모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지만)하는 정치 지형이 이루어졌다. 어제 저 당에 있던 사람이 오늘 이 당으로 옮겨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는 더욱더 심화되었다. 사실 정치와 민주주의의 과잉이 서민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와 민주주의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민주주의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힘을 갖춘 성숙한 시민사회와 사회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간추린 사회교리」 417항)가 필요하다. 그런 전제 없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선거 때만 요란한 선거용 민주주의일 뿐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13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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