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 (1)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성부의 계시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성부의 계시입니다. ‘계시’(啓示)라는 신학용어는 원래 휘장(커텐)을 열어젖히는 것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시는 하느님의 ‘자기 드러내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성부의 계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 그분의 침묵, 그분께서 겪으신 고통까지, 그분 존재의 모든 표현 방식이 다 성부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부께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아들의 말씀이 바로 자신의 말과 같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 생애의 모든 모습들이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계시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속량의 신비 ‘속량’(贖良)이란 남의 근심과 재난을 대신하여 받는 것을 뜻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노비가 돈이나 곡식을 내고 노비신분에서 벗어나거나, 국가 또는 주인에게 공을 세워 노비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던 제도를 속량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량주가 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가 받을 죗값을 대신해서 치러주시어, 우리가 죄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있도록 해주신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속량의 신비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그 신비가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속량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강생으로 스스로 가난해지셨고, 그분은 그 가난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부유하게 하셨다는 것 - 그리스도께서 부모님께 순종하시며 드러나지 않게 사셨고, 당신의 순종으로써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신 것 - 그분께서 수고하며 말씀을 전하심으로써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정화되고, 그분께서 치유와 구마로써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 것 - (끝으로 가장 결정적인 속량이라 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죄인으로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 예수님의 할례와 공현 예수님의 할례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느님과의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할례는 또한 예수님이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예수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예배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표시가 됩니다. 한편 바오로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에 비유하여 “여러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콜로 2,11) 했는데, 가톨릭교회교리서 527항은 이에 따라 예수님의 할례를 세례의 예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세례는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인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이니, 세례를 살을 도려내는 할례에 비길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할례가 우리가 받는 세례를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공현’은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심을 말합니다. 곧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교 백성에게도 예수님이 세상의 구세주로 드러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 공현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동방박사들은 주변나라의 이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강생을 통한 구원의 기쁜소식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민족들의 첫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구약이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 성조들의 가문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특전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렇듯 주님공현도 이방인들에게 까지 구원의 은혜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 이스라엘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주님공현은 의미는,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항하고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겨 있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에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성전에서 바쳐지심, 이집트 피난,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바쳐지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주님께 속한 맏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이때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온 이스라엘이 다 함께 구세주를 맞으러 온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봉헌을 동방교회에서는 ‘주님맞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그날이 바로 인류가 주님을 맞게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의 가족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길,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로, 만민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정되셨지만,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시기도 했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 예언은 예수님이 장차 지셔야 할 십자가의 봉헌을 예고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과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은 빛에 대한 어둠의 저항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장11절의 말씀처럼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전 생애를 통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신 것처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과 함께 이 박해를 나누어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피난 갔던 예수님이 헤로데가 죽고 난 뒤 이제 이집트를 떠나오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탈출을 상기시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죄에서 만민을 구원하실 결정적인 해방자로 제시되신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예수님의 신비 안에서 참 구세주를 알아보고 그분을 자신의 해방자로 고백하고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8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2)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 어릴 때의 나자렛 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조건에서 사셨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의 착한 아이로서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삶을 사셨을 것이고, 목수 아버지를 둔 아들로서 육체노동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보통의 유다인으로서 종교적으로 하느님의 율법에 순명하며 사셨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 전체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이고,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는 정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자렛의 부모님께 순종하셨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제4계명을 완전히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부모께 대한 효도는 당신이 부모께 드린 순종을 통해 잘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부모께 드린 예수님의 이 순종은 천상 아버지께 아들로서 드리신 순종의 현세적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항상 순종하신 것은 올리브 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라고 하신 그 순종을 미리부터 드러내고 이루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자렛의 일상생활에서 순종을 드리신 것은 저 옛날에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함으로써 파괴되었던 것을 복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 그 부모들이 성전에서 아들 예수님을 다시 찾았다는 사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소년 예수님의 나자렛 생활에 대해서 전해주는 유일한 이야기가 이 이야기인데,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신이 지닌 사명에 전적으로 헌신하신 분이시란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복음은 마리아와 요셉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지를 못했지만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마리아는 이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시작됩니다.(이는 로사리오기도 중 빛의 신비 1단의 내용이지요)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였는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셔서, 세례자 요한이 당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면서 망설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고난 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락하시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세례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피 흘리는 죽음의 세례를 미리 받으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에 비추어 우리가 받은 세례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가톨릭교회 교리서 537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당신 세례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미리 겪으시는 예수님과 성사적으로 비슷하게 된다.” 즉 우리가 실제 예수님과 똑같이는 될 수 없지만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처럼 죽고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가르치길,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537항)고 하였습니다. 그밖에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더 생각해 보자면, 그리스도의 세례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오셨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라는 음성이 들려왔듯이, 우리의 세례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밝히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성부 하느님께 당신의 아들과 딸로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예수님께서 타보르 산에서 거룩히 변모하셨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고 힘을 내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얼굴과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당신의 거룩히 변모하심을 보여준 것은 당신의 제자들이 가능한 한 당신의 영광을 미리부터 바라보고, 장차 그들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게 될 때, 그 수난이 당신 스스로 원하신 것임을 깨닫고 절망하지 않도록 배려하셨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메시아, 즉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를 통해 완성하시려는 하느님 나라가 이제 세상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가져오실 다윗의 자손, 곧 구세주시라고 환호하였습니다. 이때 군중들이 외친 말은 “호산나, 다윗의 후손!”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호산나’라는 말은 “구원을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계략이나 폭력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 겸손하신 구세주로서 당신의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그리스도(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신비를 깨우치길 바랍니다. 그를 통해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은혜로운 업적에 감사드리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는 단원들 되십시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9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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