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재형 선생
돈은 줬지만 대가성은 아니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최재형 선생(1858~1920)은 언론가, 교육가이며 기업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 따라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로 귀화, 청년시절 무역회사에 근무한 최재형은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가 극동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한인 노동자들의 대우가 열악함에 통역으로 나섭니다. 한인들은 최재형 덕분에 임금을 더 받아 억울함을 덜었고 러시아 노동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후 최재형은 군수산업에 뛰어들어 기업의 기초를 닦았고 한인들을 고용하며 힘을 모아 한인들 생활개선에 앞장섰습니다. 한인들의 삶은 윤택해지며 지위가 향상되고 그가 세운 소학교가 30여 개로 한인 자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에 취한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침범하자 남부 연해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 무장투쟁으로 맞서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 등과 독립군 수백 명을 훈련시켜 함경도 지방의 일제를 기습, 궤멸하고 국내까지 들어가 무장투쟁을 지휘합니다. 매체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대동공보」를 창간, 일제에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확장할 차에 그에게 조국의 청년 안중근(토마스)이 찾아옵니다. 숙명적 만남이 되고만 것입니다. 1909년 조선총독을 처단하는 거사를 함께 논의, 그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동행하여 거사를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안중근이 하얼빈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품 깊숙이 최재형이 만들어준 「대동공보」 기자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후의 최재형 존재를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러시아 변호사(하얼빈은 러시아령이었다)를 선임해 두었으나 일제가 안중근을 여순(중국령)으로 끌고 가버려 안중근을 끝내 지키지 못한 자책감으로 안중근의 가족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안중근의 의거로 광기를 부리던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항하여 한인독립군 부대를 총 집결, 사단장으로 러시아군과 함께 시가전을 벌이다 체포, 사살되어 불꽃같은 그의 삶은 연해주의 하늘에 민족의 별이 되고 영원이 되었습니다. 아! 그때가 1920년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재산을 한인들의 교육과 독립투쟁에 쏟았기 때문일까? 그가 살던 집은 우스리스크 빛바랜 담장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방치되어 깊은 고요에 묻혀 있었습니다. 기업가라면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富)는 타인과 사회에 유익하게 쓰일 때 인간에게 봉사하는 기능을 이행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29항)고 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노력해서 모은 재화는 그렇게 쓰였습니다. 기업이 권력에게 대가 없이 돈을 줄 리가 없음에도 삼성, SK, 롯데 등이 모두 대가를 바라지 않고 대통령에게 줬다고 항변중입니다. 누가 믿을까요? 그래서 뇌물입니다. 뇌물은 ‘이권을 얻을 목적으로 일정한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매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뇌물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에 숨 막히며 살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화라도 언제나 보편적 목적을 지닌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328항). 권력에 줄 뇌물이 있다면 그간 누렸던 특권과 명예에 맞는 의무를 다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이 어떨지요.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정잡배이겠지요. *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현재 나루터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2월 5일,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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