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실천하는 믿음 :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
교회 울타리 넘어 세상 속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로서 사랑으로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에페 4,15-16 참조)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성체와 성혈로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요한 13,34 참조), 벗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입니다.(루카 10,25-28 참조) 사랑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에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인간다운 삶을 유린하는 사회적 악과 불의에 짓눌린 사람들은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이든, 하느님을 불신하는 이든, 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성사(聖事)로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루카 4,18-19 참조) 하지만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거룩한 사명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울타리에 안주하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마태 23,23) 인간 세상에 죄로 인해 어두움이 가득할수록, 함께 살아야 할 인간 세상이 탐욕과 불의로 분열될수록,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불신은 극렬하게 부딪히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 언제나 세상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항구히 일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교인 전체가 깨어 있고 자신들의 사명을 의식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영을 보내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통해 세상 안에서 활동하고자 하신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느냐, 아니면 반대로 귀를 막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느냐 이다.”(게르하르트 로핑크, 「오늘날 무신론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2, 117쪽) 하느님은 결코 침묵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느님께 침묵을 강요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파견되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삶으로 증언하기보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머무르려는 그리스도인의 위선적 안이함이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이들을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을 자신만의 하느님으로 삼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예수님을 자신만의 구세주로 모시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적 편협함이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양산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구세주의 손과 발이 되기를 바라며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83항)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2월 26일,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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