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구원, 사랑의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우리 삶의 자세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마디로 우리는 신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먼저 각자의 양심에 따라 산다는 것이고, 나아가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삶을 살아가야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이 참으로 가치 있고 기쁜 것임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과 연옥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어떤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준비해두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준비해 두신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면서도 정의의 하느님이시며 심판의 하느님, 곧 상선벌악(賞善罰惡)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지옥과 연옥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1) 어떠한 하느님을 만나는 상태인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과 연옥을 하느님과의 만남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사람이 그곳(?)에서 어떠한 하느님을 만나느냐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어떠한 하느님을 만나느냐는 관점에서, 우리는 천국을 사람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상태’로, 지옥은 ‘정의로우신 하느님,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상태’로, 연옥은 ‘정화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상태’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로, 불교와 개신교에서는 정화의 과정을 겪는 연옥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2)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는 상태인가에 따라 그런가하면 천국과 지옥과 연옥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성사여부에 따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사람이 그곳(?)에서 과연 하느님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는 관점에서 천국과 지옥과 연옥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느냐는 관점에서, 우리는 천국이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상태’로, 지옥은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상태’로, 연옥은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를 하는 상태’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복직관의 구원 구원은 우리 신앙의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신학은 사람이 천국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구원을 ‘지복직관(至福直觀)’, 곧 “사람이 하느님을 직접 마주보는 상태에 이른다”는 말로 설명합니다.(지복직관은 서방교회의 신학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말인 반면, 동방교회의 신학에서는 구원을 사람이 하느님 비슷하게 된다는 ‘신화[神化]’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협력 우선 구원은 10원에서 1원을 뺀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 인간에게 1원이나 더 많은, 구원을 위해서 충분한 10원이나 주셨는데, 그 10원을 구원(9원)이 되게 하려면 우리가 받은 10원에서 1원을 도로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도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냐, 아니면 인간의 자유냐? 이는 신학 안에서 계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물음이기도 합니다. 우선 구원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을 말하자면,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100퍼센트 필요하다는 것입니다.(sola fide, 곧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구원된다!) 이에 비해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도 꼭 필요하지만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협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에 대해서 인간의 응답과 협력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너 없이 너를 구원하시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응답과 협력, 곧 자유는 어느 정도로 필요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일까요? 가톨릭신학 내에서는 이에 대해 수많은 주장과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아마 종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충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과 우리 인간은 그에 대해 꼭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이러한 내용을 비교적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에서 말씀드린 ‘9원 = 10-1원’ 이라는 도식이지요.^^) 우리가 만드는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은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천국의 삶을 살면 천국이 열리고, 지금 내가 지옥의 삶을 살면 지옥이 열립니다. 즉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할 때 천국이 우리게 열릴 것이지만, 우리가 서로 오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양보하지 않을 때에는 지옥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삶을 준비하고 살려면 남들에 대한 양보와 이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배우 박중훈이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배우의 마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의는 못해도 이해는 해야만 되는 게 연기인데, 배우는 살인자를 연기할 때도 그를 용서할 순 없어도 최소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타인을 연기하는 배우의 마음으로 실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생각에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책무를 가지고 산다면 서로를 이토록 미워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를 위하여 계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맞갖은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천국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살아가는 레지오 단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4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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