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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체성사로 눈뜨는 그리스도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5-26 조회수4,336 추천수0

성체성사로 눈뜨는 그리스도인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그분이 빵의 형상으로 오신 이유는 부족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도 먼저 다가오신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마태 26,26;마르 14,22; 루카 22,19 참조). 사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며 하시던 말씀을 반복한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변화한다. 신자들은 높이 들어진 성체를 바라본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과연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담고 있을까?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관계의 창구가 되었고, ‘증강현실’(화면을 통해 현실 세계에 가상의 콘텐츠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 인기몰이 중이다. 기술의 발전에 발맞추어 현대인은 보다 많은 것을 눈에 담으려 하지만, 오히려 현실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일어난다. 지인들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지만, 그 사람들과 실제 마주보며 대화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스마트폰 게임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해 사고가 나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점차 먼 곳은 잘 안보고 가까운 곳은 잘 보는, 근시안이 되어간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폴 로버츠(Paul Roberts)는 저서 「근시사회」를 통해 사람들은 즐거움이든 대가든 당장의 선택을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고, 미래의 선택이나 위험은 사소하고 덜 중요하다고 느낀다고 전했다. 19세기 경제학자 아서 피구(Arthur Pigou)는 마치 망원경을 늘 거꾸로 들고 미래를 들여다봐서 미래를 ‘실제보다 작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현상은 예외가 아닐 것이다.

 

 

현존(現存)하시는 주님

 

성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성 암브로시오(339~397)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빵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가? 그것은 축성에 의해서이다. 축성은 어떤 말씀으로 이루어지는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 거룩하고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 사제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병의 형상으로 계신다는 사실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교의로서 규정하고, 그것이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확인되었다.

 

만약 내 앞에 십자가상에서 수난하신 그분이 실제로 계시다면 마땅히 흠숭과 공경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성체를 형식적으로 모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성체를 영하지 않고 가져가는 경우, 아이가 조른다고 성체를 떼어주는 경우, 혼인장애에 걸린 줄 모르고 영성체 하는 경우 등 ‘몰라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쉽게 그분을 대한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성체를 일차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근시안이 볼 수 없는

 

교황 성 비오 10세(1835~1914)의 전기에 한 소년의 일화가 나온다. 성인이 살자노의 본당 신부로 있을 때, 병에 걸린 한 소년의 집을 방문하였다. 같은 시간 도착한 의사는 평소보다 몸이 좀 가볍게 느껴진다는 소년의 말을 듣고 한껏 조소하였다. 성인은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당신이 배운 의학의 효과들은 아주 잘 볼 수 있습니다. 근시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잘 볼 수 있지요. 공동묘지에 가면 병으로 죽어간 이들의 무덤으로 꽉 차 있으니…. 그러나 그리스도교 교리는 지적으로 근시안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 즉 천국을 사람들로 채워줍니다!”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1779~1865)는 영성체를 ‘지상에서의 천국’이라 불렀다.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그렇듯 고귀하신 분께서 그렇듯 낮게 내려오심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들이 성체 안에서 본 것은 표현할 수 없이 큰 ‘사랑’이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는 말씀처럼 당신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영원의 관점

 

안타깝게도, 최근 통계는 근시안이 되어가는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말해준다. ‘2015년 수원교구 통계’에 따르면, 신자 수는 증가하고 있는 데 반해 주일미사 참례자 비율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2015년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19만 1,481명으로 전체 신자 대비 22.09%에 불과했다. 2011년(24.79%), 2012년(24.06%), 2013년(23.12%) 그리고 2014년(22.51%)에 이은 지속적인 감소세이다. 주일미사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멀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느님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언젠가 마지막에 다다를 우리의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신 동작은 단지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십자가 위에서 다른 이들에게 모욕을 당하실 때 그 의미는 완전히 실현되었다.

 

빵을 나누실 때 실제 당신 자신을 쪼개신 것이다. 당장 이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영원의 관점에서는 큰 가치가 될 수도 있다. 영원한 삶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생명의 빵으로 양분을 취하는 일이 아닐까. 교황 비오 12세(1876~1958)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골고타의 제대는 우리 성당의 제대와 다름이 없다. 성당 안의 제대 또한 골고타처럼 하나의 산이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계신다.” 지금 내 앞에 골고타의 제대가 놓여 있다. 영성체로 인해 나는 모든 시대, 모든 이들과 단 한분의 영을 받는다. 이렇듯 성체성사는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펼쳐준다. 당신의 눈에는 빵의 형상으로 오신 그분이 보이는가?

 

[외침, 2017년 5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이지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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